2/21
돌담 쌓기를 시작했다. 먼저 허물어진 돌담을 쌓고 낮게 경계담을 올렸다. 도로변의 담벽을 허물어 입구를 내고 경사진 바닥에 돌을 깔고 시멘트를 부어 진입로를 만들고 입구에 정주석과 정낭을 달고... 그렇게 오전 일을 하고 동률을 공항에 데려다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목에 끈이 묶여 있는 백구 한 마리를 보았다. 태어날 때부터 묶인 채 살아가는 개들에게, 목줄 없는 세상은 어떤 의미일까 궁금해졌다. 태어날 때부터 내 목에도 목줄이 묶여있을 것이다. 몇 개는 내 힘으로 끊었겠지만, 몇 개는 여전히 목에 걸려있을 것이다.
2/22
접목 전문가 양 선생님과 통화를 했다. 약속 날짜를 계속 바꾸시니 난감한데 어쩔 도리가 없다. 기술센터에 전화를 해서 파쇄기 대여 일자를 부랴부랴 바꾸고, 다시 작업일을 정했다. 나무를 자르고 절단면에 도포하는 톱신 페스트가 친환경 약제가 아니라는 걸 한 번 더 확인했다. 수입 도포제를 찾아 주문을 했다.
수리를 맡긴 트럭을 찾아왔다. 연료 게이지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증상이 보여 수리를 맡겼는데, 카센터 사장님은 280만원 짜리 트럭에 뭘 기대하냐며 '그냥 타라'고 하셨다. 돌아오는 길에 휠캡 하나가 바퀴에서 돌돌돌 굴러 길 위로 날아간다. 차를 세우고 휠캡을 주워오면서, 다음엔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젠 은근히 기대가 되는 걸. 걱정마. 가고, 서고만 잘 해주면 돼.
기타를 잡았다. 손을 다친 후 몇 달만인 지.
비가 내린다. '에티카' 5장을 읽었다.
2/23
꿈에 반딧불이가 나왔다. 처음엔 금은빛 이른 여름 반딧불이들이 날아다녔다. 나는 꿈속에서도 '어, 봄 반딧불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 있으니 늦여름의 초록빛 반딧불이가 보였다. 그때 나는 또 '어, 가을 반딧불이도 보이네'라고 어렴풋이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상혁이 형이 가족들과 집에 와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돌아갔는데 배웅을 하는 기분이 뭔가 허전하다.
하루종일 '에티카'를 읽었다. 강모 선생의 번역본은, 마치 번역기를 돌려놓은 것 같다. 아무리 봐도 이해를 할 수가 없다.
2/24
겨우 찾은 친환경 도포제가 도착했다. 가벼운 몸살치레로 집에서 '에티카'를 끝까지 읽었다. 처음 스피노자를 알게해준 배대표님이 생각나 오랜만에 안부 전화를 드렸다.
2/25
늦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햇살이 맑고 좋아서 오랜만에 산책을 하고 돌아왔다. 톱과 전정가위 등을 깨끗이 씻고 닦고 기름칠 했다.
Quique가 음반을 보내주었다! ¡Mil gracias, Quique!
2/26
아침 일찍 양 선생님과 할머니 한 분을 모시고 과수원으로 갔다. 새로운 과수원에서 처음 일하는 날이다.
첫 해 접목할 나무는 19 그루로 골랐다. 주지 하나 정도를 남기고 나머지 주지를 베어내는데, 손 톱으로 일일이 잘라야했다. 내가 톱으로 나무를 자르는 사이 두 분은 전정을 하셨다. 전정을 배우고 싶어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이건 1-2 년 안에 어깨너머로는 배울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포기해버렸다.
나무 가지에서 죽은 아기새 한 마리를 보았다. 검푸른 깃털을 보니 까치 새끼 같았는데, 근처 나무 아래에 구덩이를 파서 새를 묻어주었다. 어쩌다가 나무가 아기 새의 무덤이 되었을까.
양 선생님이 돌아오는 길에 우리를 간낭밭으로 데려가서 간낭 한 망을 주셨다. 아주 작고 아주 달다.
2/27
전정 둘째 날. 8시 조금 넘어서, 양 선생님에게서, 도대체 왜 안 오냐, 는 전화가 왔다. 어제까지만해도 아침 8시 반까지 오라는 말씀을 여러번 하셨는데 이상하다 싶다가, 아... 연로하신 양 선생님의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걸 수도 있겠다, 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날짜를 계속 우왕좌왕 바꾼 것도 어쩌면 설명이 되는 것 같다. 약속을 하고나서도 계속 전화로 리마인드를 시켜드려야겠다 생각했다. 손등을 조금 다쳐 시무룩했는데 할머니가 시금치 한 봉지를 주셨다.
밭에 있는 나무들은 보통 스무살 안팍의 나무들이다. 나무 아래로 들어가 자세히 나무를 보면 참 많은 것들이 보인다. 많은 순들이 엉켜있고 가지는 자라기 전에 썪고 마르기도 하고 줄기는 온갖 생채기와 검은 옹이들로 가득하다. 처음 돋은 순은 부드럽고 푸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딱딱해진다. 딱딱한 순은 완전히 목질화된 가지가 되고 또 다른 순이 돋는다. 엉키고 잘리고 썪고 딱딱해지고 굳고 상처입은 카르마는 나무에게나 인간에게나 똑같을 것이다. 뒤엉킨 카르마의 굳은 가지와 순을 자르고 솎아내던 나는 문득 아기 새가 어쩌면 이렇게 뒤엉킨 나무의 카르마 속에서 죽어간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2/28
적이형 공연이 있는 날이라 오전 일만하고 나머지는 두 분께 잘 부탁드린다고 말씀을 드리고 과수원을 빠져나왔다. 김치를 좋아하시는 양 선생님께 어머니가 보내준 김치 한 포기를 담아드렸다. 오늘이 마침 형 생일이란 걸 기억해낸 나는, 몇일 째 제대로 씻지도 않은 몰골로 아는 식당에 선물을 사러 들어갔다. 그런데 어떻게 날 알아보셨는 지 몇 분이 사인을 청하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알아봐서 죄송해요."
적이형 공연을 보고, 뒷풀이까지 갔다가 사탄들의 유혹을 다 이기고 술 한 잔 안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이사를 온 지 만 2년이 되는 날이다. 마당에 수선화 한 송이가 피어주었다.
2/29
보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가 나도 병원에 들렀다. 선생님은 잘 아물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눈발이 날린다. 수선화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가 왠지 얄밉다.
초교지 교정을 끝냈다. 나는 문득 '나뭇빛살'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3/1
과수원에서 잠시 일을 하고 돌아왔다. 트럭에 와셔액이 다 떨어져서 한 병을 사다 부었는데, 한 병이 다 새고 있었다다. 과연 이 트럭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준다.
이틀 동안 악몽을 꾸었다. 밤이 되면 일찍 자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 지 않는다. 옮긴이의 글을 쓰는데, 뭘 써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3/2
옮긴이의 글을 마무리해서 보냈다.
3/3
일을 하던 중 아내의 감기가 심해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3/4
기술센터에 가서 파쇄기를 트럭에 싣고 돌아왔다. 주말에 비가 온다는데 날짜를 좀 더 미룰 수 없냐고 물어봤지만 이미 한 달치 예약이 다 차있어서 안 된다고 했다. 철물점에 들러 커버를 사서 파쇄기 위에 일단 덮어두었다.
일본의 시인 바쇼는, 파초芭蕉처럼 여린 자신을 보고 이름을 아예 파초ばしょう로 바꿨다 했지. 수선화가 마당에 자욱하게 피어났다. 오늘은 참 많이 지치고 많이 부대낀 하루였다. 사람들은 이리도 억세고 이리도 어리석고 못났는데, 너희는 너무나 작고 너무나 예쁘구나. 너무나 여리고 너무도 빛나고 있구나.
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sunt.
그러나, 모든 빛나는 것은 드문만큼 어려운 것이다.
B. Spinoza <Ethica>
rkfakd10 말하길:
생일 축하 드려요.^^즐거운 하루 보내셨겠죠~~~♡
2016년 3월 18일 — 8:55 오후
Lizzylieb 말하길:
햇빛보기 힘든 이곳 독일에서 다 먹은 아보카도 씨를 심어 3년째 키우고 있어요. 시작은 사과 한 쪽에서 나온 씨앗 몇알도 심어 싹을 틔워내곤하는 남폄의 고집 때문이었는데.. 해를 좋아하는 아보카도 세 그루(제법 단단하고 무성해졌다구요!)에게 겨울 아침 희미한 햇살도 모아모아 비춰주고 있습니다. 석달을 넘게 흙에 박아 창가에 두었더니 거짓말처럼 단단한 씨앗을 반으로 뚝 가르고 여린 싹이 올라오더라고요. 재작년 겨울엔 한 녀석의 이파리가 두어장을 남겨놓고 다 떨어져버리길래 밤이며 낮이며 따뜻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응급처치를 한 덕에 지금은 다시 무성한 이파리들을 틔워내고 있어요. 하루하루 조금씩 천천히 커가는 아이들을보면 참 경이로워요. 폴님도 귤나무에서 다른 식물들에서도 같은 마음을 느끼고 계시겠죠? : )폴님도 아내분도 모두 맘 건강 몸 건강 잘 챙기세요.
2016년 3월 17일 — 3:30 오후
nobody 말하길:
나뭇빛살! 폴님은 정말 그 햇살을 좋아하시는 것 같네요, 감기도 나으시고 손등도 나으시길 바랍니다!
2016년 3월 14일 — 5:12 오후
손님 말하길:
이번 해적방송에서는 "뭘 써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글귀가 가장 눈에 들어옵니다. 아마 지금의 제상태와 같기 때문이라서 그런듯 해요. 진심으로, 저 역시 뭘 써도 마음이 들지 않는 상황이에요.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뭘 써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거지로라도 뭘 써서 시간 내에(가령 당장 내일이랄까) 완성시켜야 하는 상황이랄까요. 마음이 어수선하니 글이 중언부언하고, 글이 갈피를 못잡고 있으니 마음이 어수선하고, 총체적인 난국이네요. 세상에 쉬운 일은 없지만, 저에게 글쓰기는 유독 어렵습니다. 언제나 늘 피를 말리고 말리고, 애간장을 태우고 태워야 겨우 한 줄이 써지니, 세상에 글 잘써지는 약이라도 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2016년 3월 10일 — 9:13 오후
홍삼정 말하길:
손등 다치셨다는 글 오늘에야 봅니다.가슴이 철~렁.아마도 찍혔겠지, 꿰매지 않았다해도 아마도 벌어졌겠지..내 마음도 찍고 간 상처소식. 때찌.
2016년 3월 10일 — 6:01 오후
은붕어 말하길:
2년이 되었다는 폴님의 말에 저의 시간도 새삼스레 가늠해봐요.
'알아봐서 죄송해요'에서 웃게되고 아는식당에서 무슨선물을 사셨는지도 궁금ㅎㅎ
수선화가 저렇게나 예쁜 노란색이었구나 싶어 더 봄을 기다리게 되네요.
제 생활과는 너무도 다른 삶이라 폴님에겐 일상이 저에겐 여행기 같이 느껴지기도 해요.
그곳의 봄은 또 얼마나 예쁠까요.
2016년 3월 9일 — 11:12 오전
camel 말하길:
역동적이면서 고요한 기운의 일상이시네요.카르마가 무위 할때 빛나는 것이 되려나요…트럭이 불안하네요. 슬슬 암시를 보내는것 아닐까요.조심하시구요~수선화 꽃잎 위에 앉은 눈송이는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폴님 마음과는 아랑곳 없이요 ^^짙은 봄냄새가 좋아요.돌담 곱게 싾아지길요~~
2016년 3월 8일 — 11:18 오후
MJ 말하길:
폴의 소식은 언제나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폴~ 폴이 기타치는거 ..오래오래 보고 듣고 싶어요~
손.. 조심!
2016년 3월 7일 — 9:32 오전
귤 말하길:
책이 나오는 군요. 이번에도 참으로 기대가 되네요.폴님. 화이팅!!!
2016년 3월 6일 — 10:46 오전
귤 말하길:
언젠가" 알아봐서 죄송해요."라고 말하는 날이 오길 바라는 일인 이옵니다.
2016년 3월 6일 — 10:49 오전
연수 말하길:
올려 주신 음악 틀고 있으니 고등학교 자습시간에 한쪽 귀에 이어폰 꽂고 세계음악기행 듣던 때가 생각나요. 고3 때는 진짜 거의 하루도 안거르고 듣고 그랬는데 대학교 올라가서 잘 안듣다가 문득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듣는데 마지막 방송이더라구요. 그런데 지하철이라 잘 들리지도 않고 치직거리고 그래서 무작정 지하철 내리고 나와서 길에 서서 들었어요. 누가 봤으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으려나. 그게 벌써 5년 전 여름이었던 것 같아요. 오늘 이 글 읽으니 부쩍 시간이 많이 지났구나 생각하게 되네요. 그새 인턴을 하고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고 이력서 업데이트하고 더 많이 배웠다고 쓰는데 더 모르는 것만 늘어나고 작아지는 것 같아요.
2016년 3월 5일 — 9:55 오후
spingirl 말하길:
아이폰에 씨디의 음악을 넣는 방법을 몰라 휴대폰가게에 가는 가족들에게 폴님씨디한장과 아이폰을 주고 넣어와 달라고 배워와 달라고 보내고… 아차,, 낮에 트위터에서 별표해두었던(남들은 하트라는데 저는아직 별표예요) 폴의 일기가 생각나서 들어와 봤어요. 겨울 나느라 감기도 앓고, 저런 손도 다치셨구나. 그리고 농사준비,,,,어제는 잘 안되던 것이 오늘은 되는 것을 폴의 일기에서 보아요.옮긴이의 말이 안써진다는 다음 날 다 써서 보냈다니나뭇빛살이란 말도 좋구요.이년된 집을 다시 매만지는 폴의 손길에서 엊그제 이사한 집을 매만져야는 게 귀찮아진 마음을 조금 다독여보고요.건강.. 건강하세요^^ 특히 손가락,,,, 목줄조심!
2016년 3월 5일 — 8:21 오후
Grace 말하길:
komorebi 이전에 폴님이 알려주셔서 알게된 단어예요 :) 이젠 에티카를 음악으로 배울 날도 머지않은 것 같아요 대단대단~ 사탄들의 유혹을 이기고 술을 한 잔도 안드셨다니!! (절대 믿을 수 없어)
2016년 3월 5일 — 7:39 오후
ciiz 말하길:
벌써 2년이나 되셨군요. 시간이 빠르다 싶다가도 폴님만큼이나 저도 많은 변화가 있었가는걸 생각하면 2년밖에 안된것 같기도 하고요. 폴님의 농사일기가 점점 익숙하게 느껴지는걸 보니 신기하기도 하네요. ^^
2016년 3월 5일 — 6:57 오후
에그마리 말하길:
수선화가 고와요. 잠깐 타지에 와 있는데, 비가 오는 새벽에 노래 들으며 폴님 소식을 읽고 또 보고 있으니 참 좋아요. 몸과 마음이 잔뜩 가라앉아 있는데, 그래도, "… 알아봐서 죄송해요" 에서는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흐흐.
2016년 3월 5일 — 1:15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