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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25

2/8

일어나보니 흰 눈이 검은 땅 위에 소복히 쌓여있다. 로마네스코 브로컬리를 사왔다. 몇 년 전, 일본에서 우연히 보고 반했던 나는 이곳으로 오면서 언젠가 꼭 키워보리라 마음먹었는데. 아. 손 안에 우주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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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dra Corrizo의 Mi Jardin, Clara Cantore의 Canto de Ordeno. David Moore. 

 

2/9

옷장 속 기타들을 꺼내 작업실로 가져왔다.  마호가니. 가문비나무. 삼나무. 인디언 로즈우드. 마다가스카르 로즈우드. 부빙가. 사펠. 하나하나 다 다른 조합의 기타에 코를 대고 향기를 맡다보니 어느새 방 안이 숲이 된 것만 같다. 습도는 30 %를 오락가락하는데 바다 옆에 사니 낮은 습도가 오히려 고마울 뿐이다.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아들이 경작하고 있다는 시코쿠의 농원에 팩스를 보냈다. 기타 수리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소방관들의 핏속에서 처음 보고되는 불소 화합물이 발견되었다는 논문을 읽었다. 불과 싸우는 이들은 마치 영혼과 싸우는 이들 같다.  

 

2/10

농원에서 답이 왔다. 일을 도와주면 숙식을 제공하지만 생활은 다른 연수생들과 공동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재빨리 우연히 찾은 마일리지로 마쓰야마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세상에는 반드시 나의 천사가 있으며, 나를 천사로 여기는 사람들도 반드시 있다.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건, 그런 천사들이 하나 둘 사라져가는 것이다.

 

2/11

도경형에게 최근 JACS에 실린 논문 하나를 보내주십사, 부탁을 해서 읽었다. CLICK chemistry로 만든 하이드로젤. 언젠가 생각했던 연구가 누군가에 의해 진행되고 있구나. 저녁으로 왠 일인지 너구리 알덴테 를 먹었다. 

 

2/12

구름 같은 다섯 꽃잎의 운간초와 하얀 디모르포테카를 화단에 심었다. 공연 문제로 계속 통화, 회의, 서치가 이어졌다. 나에게 공연장이란, 공연이 펼쳐지는 공간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관객이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객석에 앉는 순간까지 경험할, 모든 공간을 의미한다. 그 모든 공간을 다 책임질 수야 없지만, 적어도 내가 원하는 아우라 속에서 관객들과 함께 하고 싶다. 

세상이 완벽하다면 노래 따위는 없을 거야. 그러니 천국에는 노래가 없을 거야. 아무도 노래를 부를 필요가 없을테니까. 노래는 땅의 것이지 하늘의 것이 아니니까.

새와 함께 살아가려면, 새는 새대로, 나는 나대로, 알아서 살아야 한다. 

 

2/13

미야자와 겐지의 세번 째 전집이 도착했다. 근사하고 온기없는 글들이 넘치는 세상에, 몇 십년을 넘어 나에게까지 닿아준 투박하고 가슴벅찬 이야기들. 그의 생전 유일한 단편집 서문은 이렇다. ("미야자와 전집 3"에서 재인용, 번역: 박정임)

우리는 얼음사탕을  원하는 만큼 갖지 못해도, 깨끗하고 투명한 바람을 먹고 아름다운 복숭앗빛 아침 햇살을 마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너덜너덜하게 해진 옷이 밭과 숲 속에서는 가장 좋은 벨벳이나 모직 또는 보석이 박힌 옷으로 변하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내 이야기들은 모두 숲과 들판과 철도선로에서 무지개나 달빛에 받은 것입니다.

정말로 떡갈나무 숲의 푸른 저녁을 홀로 지나가거나 십일월의 산에서 바람에 떨며 서 있으면 정말로 그런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정말로, 분명히 그런 일들이 있었던 것 같은 이야기를 나는 그대로 쓴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 이야기 가운데에는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그냥 그랬구나 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나는 그 구분을 할 수 없습니다.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런 부분은 나 역시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작은 이야기들 몇 조각이 당신에게 투명하고 진정한 음식이 되기를 마음 깊이 바랍니다.

 

1923년 12월 20일

미야자와 겐지

 

2/14

옆집 할머니께서 지금 봄동은 보약이라며 한 양동이(!) 그득 봄동을 가져다 주셨다. 손질해서 챙겨넣는데만도 한참이다. 만들기 시작한 지 일년 여 만에 바리톤 기타 연주곡을 거의 마무리했다. 이제 연습만 하면 된다. 에스페란토에 관심이 생겼다. 집 근처에 서점 하나만 있다면 참 좋겠는데.

 

2/15

비가 왔다. 오랜만에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작은 아버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저녁무렵 집으로 오셔서 차를 한 잔 하고 돌아가셨다. 

 

2/16-2/22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 더 트라이브. 두 편의 영화를 보았고,

부산. 순천. 여수. 진주. 사천. 다시 부산을 돌았고.

할머니, 할아버지.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지금 제가 사는 이 동네 아이들처럼 철없는 꼬마였을 때가 있었겠죠. 그 꼬마들이 뛰고 걷던 길들은 이제는 흔적도 없어졌네요. 마을 입구 구판장도 사라졌고, 지금쯤이면 잘린 볏단이 뾰족뾰족 나와있을 논은 희퍼런 하우스가 되어 있었어요. 논이 없으니 그 흔하던 웅덩이도 없어졌고, 진삼선 철길은 이젠 옛길보다 더 넓은 아스팔트 길이 되었어요. 밤이면, 할아버지는 그렇게 바닷가로 가지 말라고 호통을 치셨는데, 그 갯길은 이제 해변도로가 되었고 바다와 어울리지 않는 멀뚱한 횟집 건물 몇 채가 있네요. 밀물이라 그런가 턱 밑까지 차오른 검초록 물빛 한 가운데로 귀신이 살고 있다던 바위섬은 머리 꼭지만 보였어요. 요강이 뒤집어 졌다는 그 돌 무더기 안은 여전히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새가 되었다는 하얀 영혼들은 그래도 여전히 바위를 지키고 있었어요. 친할머니 집엔 이층짜리 다세대가 들어셨고요. 아버지는 시댁과 등진 엄마 대신 나를 데리고 다녔고, 그래서 어린 나에게 명절은 고역이었던 기억이 나요. 살갑지 않은 친척들의 눈빛만으로도, 아무도 우리 부자를 환영하지 않는다, 온 몸으로 알았으니까. 그럴 수록 나는 더 명랑한 척 했으니 아둔한 어른들은 그게 정말인 줄 알았겠죠. 고모부의 스텔라를 타고 집 앞 돌길을 달릴 때 엉덩이를 툴툴거리던 그 기분은 그래도 나쁘지 않았어요. 손바닥만한 돌이 울퉁불퉁 깔려있던 그 기름집 앞 돌길도 이제는 없습니다. 순천에서 본,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기와집은 삼천포의 바닷가 외갓집과 같았는데, 지금 외갓집 터엔 기와집 아닌 경량 철골조, 그러니까 쉬운 말로 판넬집이 들어서있지요. 나는 그 튼튼하고 기품있던 진갈색 대청 마루가 항상 자랑스러웠어요. 마른 황토색 덧칠을 한 동네의 다른 집 마루는 외가집에 비하면 뭔가 천박해 보였으니까. 두량마을의 선산 밤나무는 다 어디로 갔는지 편백나무와 이름모를 유실수들이 대신 심겨져 있고, 순천의 처외삼촌께선 선산에 매실나무며 고로쇠나무를 심으신다고 하고, 성묘를 갈 때 가장 반가운 건, 어디선가 들려오는 물소리에요. 그 고적한 산 속에서 어떤 류의 소리든 반갑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물기운 가득한 소리가 더 좋은 건 왜인지. 소리는 머물고 물은 흘러가니 그런 건가요. 그리고 17 년만에 들른, 아버지의 계모, 할머니 산소 앞에서 어머니는 결국 우셨고, 묘지 관리비는 십몇 년이 밀려있고, 온 산 무채색 비석만 가득 들어찬 금광 같은 묘지의 하늘 위로 어느 조상들의 혼령인지 까마귀 떼만 자욱했습니다.

 

2/23

노래는 공예품이다.

 

2/24

집에 돌아오니, 천리향이 한 가득 피었다. 오래 비운 뒤 돌아올 때마다 꼭 꽃을 피워주는 우리집. 마른 화초에 물과 거름을 주고 집정리를 했다. 오랜만에 잔디밭을 뛰는 보현이도 즐겁다. 

 

2/25

수리된 기타를 가지러 산 기슭 동쪽 마을로 갔다. 손수 90 일간 지으셨다는 나무 집에 차려진 작은 공방에서 기타를 건네받았다가 픽업 교체를 뒤해 다시 맡겨두었다. 바인딩이 벌어진 Peter Rowan 스틸 기타도 같이 맡겨두고 차를 한 잔 마시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장실 옆 조그마한 니쉬에는 꽤 빨리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코끼리가 한 마리 있었다.

병원에 가서 UBT 검사를 했더니 아직 제균이 안 된 것 같다고. 우선은 궤양 치료를 먼저하고 다시 제균 치료를 하기로 했다. 섬이라 그런지 대학병원임에도 그렇게 한적할 수가 없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 집에 오니 작업실에 나무 두 그루가 사라진 기분이든다. 8현 기타로 곡을 쓰기 시작했다.

사람이 찰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얘기가 성경에 있다지. 난 하느님을 믿지는 않지만, 정말 그런 것 같아. 어릴 땐 갓 만든 찰흙인형 같아서 조그만 일에도 그저 변하고 말지.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마르고 굳어서 왠만한 일에는 꿈쩍도 않다가, 언젠가는 아주 작은 일에도 와작, 금이가고 말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