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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닿은 지 오래된 집의 냉기란 신기하다. 여미고 닫고 잠근 집 안으로 먼지는 어떻게 날아온 건지 모르겠다. 냉랭한 집안을 밀고 닦고 치우고 변기의 물을 너댓번 내리자 비로소 집에 온기가 돌아온 기분이다.
점심 즈음 가스집에서 초등학생 아이만한 가스통을 두 개나 가져왔다. 기사님이 묻는다. "인제 또 어디 안 가시죠?" "아... 당분간은요." 서울로 가기 전 우편물을 넣지 말아달라고 우체국에다 부탁을 했건만, 우체통은 온갖 고지서가 수북하다. 소포 상자 하나는 잔디밭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었으니, 분명 비도 맞았을테다. 옆집 형님이 담 너머로 나를 부르시더니, 쇼핑백 한 가득 담긴 대형 우편물을 전해주었다. 출판사에서 보내준 동화책하며 어디어디서 날아온 서류며 우체통에 들어가기엔 큰 것들이다. 까치발을 한 채 담너머로 서로 새해 인사를 주고 받았다.
소국이 어느새 지고 있다. 치자나무는 잎이 시들해보인다. 마당 군데군데 잔디가 노랗게 변해있다. 언뜻 보기만 해도 농사 짓는 사람들이 말하는 '제초제 맞은' 형상이다. 11월에 뿌린 친환경 제초제 때문인가. 분명 선택성 제초제였는데. 판매상에 전화를 걸어도 응답이 없다. 밤에 한성 형님이 전화를 거셨다. 원익 형님, 형석 형님과 전화로 새해 인사를 주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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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장에 들렀다. 제철이라는 방어는 물론, 잿방어가 어물전에 보였다. 아귀는 알이 찰대로 찼고, 농어, 점농어는 팔뚝보다 큰 놈둘도 보인다. 거뭇거뭇한 점이 박힌 수조기도 보이고 붕장어는 씨알이 점점 커지고 있다. 작년 2월, 처음 장에 들렀을 때, 왠만한 아이 허벅지만한 붕장어를 보고 기겁을 했었지. 여수배들이 추자도 근처에서 잡았다는서대 두 마리를 사기로 했다. 쌈채소 값은 많이 뛰었지만 월동채소의 가격은 여전히, 싸다. 올해 공급과잉이라는 동쪽 당근은 산지 폐기를 하는 밭이 늘고 있단다. 머리통만한 양배추가 한 통에 천원이다. 할머니들이 하늘타리며 뎅유자며 귤을 파신다. 그냥 봐도 집에서 따온 것들이다. 심지어 집에서 키웠다는 레몬도 보인다. 꽃집 근처만 가도 천리향 향기가 사늘한 공기를 타고 퍼진다. 노란 수선화 세 포트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짐을 부려놓고, 귤밭으로 넘어갔다. 처음 보는 차가 밭 앞에 대어져 있었는데 어떤 분들이 밭 안에 있는 농가주택을 수리 중이었다. 2년 계약으로 들어와 살기로 했다니 형님이 세를 놓으신 모양이다. 2년 후엔 폐원될 운명의 과수원이다. 밭 안으로 들어가니, 여전히 싱싱한 귤이 달려 있는 나무들이 즐비하다. 작년 봄, 나무마다 붙여준 빛 바랜 태그가 아직도 매달려 있고, 작년 여름 풀을 뽑다 나무 둥치에 걸어둔 하얀 그늘막모자도 그대로다. 이 나무들이 베어질 거란 말이지. 1 년 사이, 그리 많이 돌봐주지도 못했지만, 깊은 정이 든 모양이다. 언제 내가 나무들과 정이 들어봤겠는가.
어떤 귤은 말라있고, 어떤 귤은 새들이 쪼아먹은 건지 구멍이 숭숭나있다. 아직도 알이 단단한 귤 하나를 먹어보니 그렇게 맛날 수가 없다. 적어도 당도가 12-13 브릭스는 넘을 것 같다. 형님은 나무가 가지에 달린 귤의 당분을 다시 빨아 먹는다고 하셨다. 잘 이해가 가진 않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 싶다. 그리고 3월 중순즈음에야 전지전정을 하라신다. 겨울을 견뎌낸 나무도 몸을 추스릴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다.
새로 시작할 밭은 이미 정리가 다 되었다고 하셨고, 토요일에 임대차 계약을 하기로 했다. 농업경영체 등록을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할 것 같다. 토양검정도 준비해야겠다.
보현에게 오랜만에 찐 돼지 정강이뼈를 주었다. 치석 제거에 이만한 게 없다. 오랜만에 운동을 하다가, 뭔가 몸에 수상한 기분이 들어서 운동을 그만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먹기 시작한 약의 부작용인가, 싶었다. 드로잉 몇 개를 다시 스캔하고, 그림책 번역을 시작했다. 스위스에서 나온 꼬마 귀신의 이야기이다.
아침에는 Avishai Cohen과 Nitai Hershkovits의 듀엣앨범을, 저녁에는 John Taylor와 Charlie Haden의 Nightfall을 들었다. 2013년의 장기 공연이 생각났다. 회가 거듭되고 24회의 공연을 마칠 무렵, '이만하면 됐어' 할만큼의 'chemistry'가 생겼었지. 듀엣이란 그런 것이다. 듀엣으로, 혹은 트리오로 연주가 하고 싶다. fast food과 fast fashion이 있다면 fast music도 있을까. 그렇다면, 대척점에 서 있고 싶다.
필터도 후드도 다 빼고 사진기를 들었다. 프레임 안에 들어올 때엔 조금 더 천천히. 피사체를 좀 더 살피고, 누르기. 내가 진정 원하는 순간에 얼마나 '가깝게' 스냅할 수 있을까. 놓치고 나면, '가깝다'는 것이 의미가 있긴 한가.
간밤, 검은 하늘에 유난히 밝은 구름 한 덩이가 흘러가고 있었다. 구름이 어찌도 저리 밝을까, 하며 바라보는데, 구름 뒤에 환한 달이 있었다. 장막 너머로 세상 저편을 바라본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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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벌번역을 마무리했다. 토마스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인터뷰 번역을 시작했다. 수선화를 심었다. 시든 국화 꽃대를 정리하고, 꽃나무를 옮겨심었다. 마당의 나무 아래에 밑 거름을 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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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수리를 하고 돌아왔다. 사람도 자동차도 오래될수록 고칠 게 참 많아진다. 수선화 네 포트를 더 심었다.
11dot2 말하길:
:) 장에가고, 감귤을 만지고, 소년과 대화하고…어째서 나의 보통의 일상은 기억하기 힘든데 폴님의 일상은 이렇게 섬세하게 기억될까요. 매일 대화하고 만지고 바라보면서도 실제로는 대화하고 만지고 바라보지 않는 일이 많은것 같아요.
2015년 1월 19일 — 8:49 오후
me2ran 말하길:
반가운 꽃이네요^^ 제가 젤루 좋아라 하는 꽃입니다. 꽃말두요.
2015년 1월 19일 — 11:01 오전
lightnshadow 말하길:
늘 눈팅만하다가 처음 글을 남기는 것 같아요
거의 일년을 준비했던 시험에서 떨어지고
심신을 달래며 집에만 있었어요 ㅠㅠ
폴님 소식 기다리고, 읽고
나도 폴님처럼
좋아하는 일 하면서 하고싶은 일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려고 했는데
한동안
차라리 좋아하는 일이 없었다면 아무거나라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했어요
폴님 음악이, 글이,
마음을 이끄네요
나도 하루하루 기록하며 다시 기운내서 살아봐야지
라는 다짐도했어요 그러면 좀 불안함이 감춰질까해서…
26살. 아직 늦은건 아니겠죠?
2015년 1월 17일 — 11:16 오전
lucidsoyo 말하길:
겨울에, 노랗게 피어있는 수선화가 왠지 신기방기해서 누운자리에서도 사진생각이 나더라구요.
언제부터인가 웹상에 글을 남기지 않게 되었어요. 자주가는 카페도 게시판에도 유령회원이죠. 여긴 한갓지고, 평화롭다는 생각이 들어 글 남기기가 수월해요. 단지 회수가 안된다는 점이? *-*;;
아이가 인플루엔자에 걸린지 일주일이 되어 갑니다. 아픈 녀석치고는 쌩쌩해서, 나가지도 못하는데 그 에너지를 가두는 집은 너무 좁군요… 한계에 달했는데 이제 내일이면 등원이에요.
인플루엔자가 스물스물 올라오고 있고, 노로바이러스가 유행이라는군요. 저도 덩달아 감기에 걸렸는데, 쉬지 못했어요. 쉰 것 같기도 하고.
어제는 권희철평론가가 읽어 주는 권여선의 ‘봄밤’을 들으며 잠을 청했습니다. 귀로 읽으니 작가님이 달필은 아니구나는 생각이 드네요. 전체적인 이야기는 너무 훌륭하지만요.
날씨에 관련한 뉴스를 보니 이제 한파도 거의 다 지나갔다고 해요. 봄이 저기 저멀리서 오는 걸까요. 노란 수선화.. 생각할수록 신기하네요..
2015년 1월 13일 — 2:52 오후
코스모스 말하길:
폴님의 글을 읽으니 작년의 제주에 봄에 머물었던 기억이…
강정 초등학교에 그때 2월 말에 가니 꽃이 피어 있어서
신기했는데…그기억이 나네요.
귤 밭의 풍경도 …생생하게 …눈 앞에 .,,
수선화를 보니 기분이 좋아지네요.
2015년 1월 12일 — 8:52 오전
lucidsoyo 말하길:
일전에,
저희 집 실외기실문으로 우웅~하는 소리가 들린적이 있어요. 가끔 바람이 세찬 날 들리고는 하죠. 바람소리라고 그랬어요. 도심아파트에서 듣는 그 소리는 썩 기분좋은 소리는 아니지만요. 그렇게 세차게 자신을 알리기도 하고, 집이 오래되면 될 수록 먼지길, 바람길이 만들어진다고 했어요. 바람이 지나면서 문틀도 닦이고 까이고.. 그런다는 것이죠. 그 말이 왠지 마음을 끌었어요. 그래서 청소를 할때면 가끔 구석구석을 살피고는 해요….
그런데, 옛날 일기들은 이제 못보는 건가요. 닻별을 마지막으로 해독했었는데. 아쉽네요. 그치만 많이 아쉬워하지는 않을게요….
2015년 1월 12일 — 12:38 오전
gat1111 말하길:
수선화가 참 예뻐요.
뒤에는 치자나무 예요?
아참….저도 ‘안녕, 폴’읽고 싶어서 주문했는데 오늘 왔네요.
잘 읽을게요. 폴!
“안녕, 폴” ㅋㅋ
2015년 1월 10일 — 11:57 오후
눈꽃새댁 말하길:
폴님 약 드시나요? 아프시면 앙대요 ㅠㅠ 도시보다 깨끗한 제주에서 모두 나으시기를….
기도합니다
2015년 1월 10일 — 7:28 오후
eggmarie 말하길:
아래 봄눈,님 댓글처럼 폴님은 다른 스물네시간을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분명 폴님 좋아하는 음악 들으며 멍때리는 시간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그 많은 일들을 다 하고 사실까.
… 부지런해지고 싶지 않은데, 그냥 게으른 채로 살고 싶은데, 폴님 일기를 읽으면. 아아. ㅠㅠ
2015년 1월 10일 — 3:37 오후
봄눈 말하길:
폴의 글을 볼 때마다 정말 궁금한 것.
폴의 수면시간은 얼마쯤 될까요?
폴은 하루를 48시간으로 사는 사람 같아요.
바지런한 폴!
2015년 1월 10일 — 5:11 오전
chaassoom 말하길:
끙. 자꾸 ‘지적질’하는거 같아서 마음은 불편하지만(…)
메인화면의 ‘새로운 댓글’ 아래에, 새 글이 뜨는데는 물고기사진이 조그맣게 보이는데~ ‘더읽기’를 클릭해서 들어와보면 물고기사진이 안보여요ㅎ 아이폰,아이패드 기준입니당 ㅎㅎㅎ
(+) Nightfall앨범 얘기가 계속 보여서 한마디 거들어보자면..ㅋㅋㅋ Nightfall앨범은, 음악만큼이나 표지사진이 좋은것 같아요.ㅎ
2015년 1월 10일 — 12:31 오전
폴 말하길:
그러게요. 잿방어 사진이 계속 뜨더군요. 아직 워드프레스를 잘 모르는 바, 이해해 주시길. :)
2015년 1월 10일 — 9:08 오후
파인트리 말하길:
폴님. 이제 수선화로 떠요 :)
2015년 1월 11일 — 11:27 오후
파인트리 말하길:
폴님의 음악은 이미 Slow Music이죠.
글을 읽으며 나무가 귤에 남아있는 당도를 쭉쭉 빨아들이는 상상을 했어요. 왠지 말이 되는 것 같고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그렇다면 점점 더 달고 단 귤을 수확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2년후에는 없어진다니 아쉬우실 것 같아요.
또 번역하실 동화책 기대할게요. 언젠가 폴님이 직접 쓰실 동화책도.
2015년 1월 9일 — 9:25 오후
saudade 말하길:
숨쉬기 버거운 요즘… 폴님의 일상을 인생극장 보는듯한 기분으로 천천히 상상하며 읽었네요.. 거기에 음악까지.. 수선화를 찍은 사진은 뭔가 어수선한 제 마음까지 정화시켜주는 듯.. 긴 호흡 잘하고 가요 :))
2015년 1월 9일 — 9:24 오후
allthatk 말하길:
오늘은 글에서 ‘손길’의 소중함이 느껴지네요.
어른들이 말씀하시길,
집이나 방이나 사람 손을 안 타면 금방 낡아버린다는군요.
사람도 같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애착, 스킨십… 이런 말이 대신하고 있지만요.
2015년 1월 9일 — 9:23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