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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8-7/26

6/28

반딧불이가 가득한 숲에 다녀왔다. 숲이 점점 어두워지고 황금 불빛이 하나둘 켜지더니 곧 세상은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되었다. 이 아름다운 곤충은 유충에서 깨어나서 보름 깨를 산다.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 빛으로 깨는 그 보름의 삶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사랑을 나누고, 세상을 떠난다. 내가 사는 여기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 대부분 사람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노을이 그렇고 휘파람새가 그렇고 동박새가 그렇고 풀벌레들이 그렇듯이. 하지만 오늘 밤 반딧불이는 이렇게 스스럼 없이 우리 사이를 닿을 듯 닿을 듯 날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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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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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초기를 사러 기계상사로 갔다. 예초기를 한 번 도 써본 적이 없다는 내 말에, 사장님께서 손수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셨다. 

삼바의 밑 그림을 다시 찬찬히 그려보았다. 

 

6/30

곡이 완성되었다. 삼바 같기도, 보사노바 같기도 하다. 

 

7/1

바닷가 길을 걷는데, 어느 부부가 무언가를 열심히 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풀인가요? 번행초에요. 뉴질랜드에선 그냥 샐러드로 먹는다는다죠. 허준이 스승의 암을 고치려고 썼던 약초라죠.  지천으로 자라는 스페이드 모양 이파리 가운데에 노란 꽃망울이 맺혀있다. 어린 잎은 짭짜름하고 사각거린다. 

윤성 씨가 다시 피아노를 녹음해서 보내주었다. 키와 템포를 바꾸고 가사를 좀 더 손 봐야 할 것 같다.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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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초를 시작했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밭이지만, 여기와 저기가 식생이 완전히 다르고, 지피식물과 그 위에 높게 자라는 식생도 입체적으로 다르다. 칡이나 하늘타래 같은 덩굴성 식물이 나무를 감고 올라가기도 한다. 처진 가지가 문제고 나무 근처에 자란 껑충한 풀들이 문제다. 보이는대로 자르고 끊고 정리를 해 주었다. 천상초는 왠만하면 뿌리 채 뽑아냈다. 줄기를 잘라버리면 더 굵은 줄기가 그것도 삐뚤하게 자라나기 때문이다. 더 힘들어진다. 풀을 뽑을 때마다 어김없이 지렁이들이 뿌리에 달려 나온다. 대부분 그리 힘들지 않게 뽑힌다. 풀뿌리가 땅을 갈아주고 있다. 

바다를 걷다가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반드시 노래로 짓고 싶은 것들이라 메모를 해두었다. 

 

7/3

한 필지 예초 작업을 끝내고 돌아왔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하루 종일 집을 본 보현이를 데리고 나가 신나게 달렸다. 

 

7/4

세 편 썼어,

그가 말했다.

시를 세다니.

에밀리는 시를

상자 안에 던져버리곤 했지, 난

그녀가 몇 편인지 헤아리는 모습은 상상조차 못하겠어,

그저 차 포장지를 펼쳐서

또 한 편을 썼지.

그게 옳아. 좋은 시란

차 냄새가 나야 해.

아니면 거친 흙이나 새로 쪼갠 장작 냄새든.

 

- O. H. Hauge,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실천문학사, 황정아 역)

 

하우게의 시를 읽었다. 메모를 꺼내 곡을 지었다. 

 

7/5

분무기로 영양제를 뿌리고 풀을 뽑았다. 현상이 집에 왔다. 트랙터를 한 대 장만했다고 했다. 예초기 얘기를 하자 육지에서 쓰는 예초기와 여기서 쓰는 예초기가 다르다는 얘기를 했다. 이유는 뭘까. 밤에는 펩톤 아이 둘과 은주, 보현이가 집에 왔다.

 

7/6

태풍 예보에 예초를 마무리해야 겠다 싶어 밭으로 갔다. 장마가 지나고 나면 걱정말라는 듯이 풀은 또 자라있을 것이다. 예초를 다 끝내고 돌아와서 키와 템포, 가사를 바꾼 새로운 악보를 다시 윤성씨에게 보냈다. 아직 제목을 어떻게 붙여야 할 지 잘 모르겠다. 이렇게 가끔은 곡을 다 써놓고도 제목을 못 붙이는 경우가 있다. 

 

7/7

하루종일 비가 내려서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엊그제 쓴 곡을 펼쳐놓고 손을 보았다. 기타와 피아노를 왔다갔다 이 키와 저 키를 왔다갔다 가사도 이리저리 손을 보지만 곡이란 게 한 번 만들어지면 참 바뀌기 쉽지 않다. 이번 앨범 작업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누군가와 마주 앉아 얘기를 한다고 치자. 한 시간 정도의 대화가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어떤 발란스를 이룰 때, 더 매력적일까. 그게 사람이 아닌 한 장의 앨범이라면 어떻게 될까. 

 

7/8

귀현씨가 유약도 바르지 않은 투박한 옹기 한 개를 가져다 주었다. 오랜만에 후박이를 보고 왔다. 멀리서 우리를 본 후박이는 껑충껑충 울타리까지 달려와주었다. 출판사에서 『책 읽는 유령 크니기』 책을 보내주었다. 동네 초등학교에도 책을 보내주신다고 하기에 담당 선생님 연락처를 알아봐 드리겠다고 전했다. 핑계김에 아이들 얼굴이나 보고 올까. 

 

7/9

동희네 가족이 집에 와서 함께 저녁을 먹고 술을 마셨다. 술김에 동하에게 전화를 걸어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었다. 마침 제비 알 두 개가 현관 앞에 떨어져 있다. 이번에는 두 형제가 태어났구나. 앨범의 타이틀을 다시 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7/10

Db key로 바꾼 버전의 연주를 윤성씨가 보내주었다. 가족들과 스위스 여행을 갈 예정이라는 형석 형님과 길게 전화 통화를 했다. 생각나는대로 설명을 드리고 이것저것 열심히 말씀 드리다가 전화를 끊었는데 나도 모르게 애뜻해졌다. 딱히 한 두가지를 꼽을 수 없이 무언가가 몹시 그리워졌다. 

 

7/11

바람이 거세다. 들에는 주황빛 왕원추리 꽃이, 산에는 수박조각 같은 자귀나무 꽃잎이 흔들거렸다. 나는 이미 밤과 낮의 구분이 사라져버렸다.

 

7/12

노래를 만든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승부인지.

 

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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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새고, 하나의 곡이 마무리 되다. 

 

7/14

뉴호라이즌호가 명왕성에 가까워지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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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을 썼다. 제목은 '명왕성'.

 

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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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연필을 깎았다. 까만 연필심이 피아노 위로 또르르 떨어졌다. 가사를 깎아 뿌리면 그대로 음표가 되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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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와 승준이 집에 와서 패키지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돌아갔다. 과연 이 희대의 박스셋 아이디어는 정말 구현될 수 있을 것인가. 원영형의 새 앨범과 하비누아주 1집, 조정아의 가야금 산조, 홍혜림 등의 음반을 주문했다. 여름 비료 13 포대를 주문했다. 8 포대 + 5포대 씩 뿌리면 될 것 같다. 세희씨에게 교정 교열을 부탁드렸다. 흔쾌히 맡겠다고 답을 해주셨다. 

 

7/16

호규 식구들과 점심을 먹었다. 작년 이곳에서 호규와 공연하던 때가 아론이의 예정일 즈음이었지. 일 년이 지나고, 이렇게 한 식구가 늘었다. 점심을 먹고 같이 바닷가를 걷는데 동네 가요제 참가를 독려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이름하여 '브로컬리 가요제'.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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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에 가서 비료를 찾아 밭에 부려놓고 가지 정리와 적과를 했다. 이미 풀이 꽤 자라났다. 돌아오는 길, 두 송이가 차를 멈춰세웠다.

도쿄의 녹음 엔지니어 카와사키 상과 연락이 닿았다. 마당 나무들과 잔디밭에 영양제를 엽면시비했다. 옥상에 올라가 소나무에도 키토 목초액과 아미노액비를 뿌려주었다.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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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선휴씨가 집에 들러 선물을 주고 가셨다. 마당에서 도마뱀을 보았다. 박새 두 마리가 소나무 끝에 날아들어 무언가를 열심히 빨아먹고 있었다. 집에 박새가 날아든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점심 시간이 지나서 밭에 갔다. 200 여 주 나무에 골고루 비료를 뿌려주었다. 모든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게 허리숙여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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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물마루 위로 초승달과 별이 떠 있다. 그간 날이 좋지 않아 배가 많이 뜨지 못했던 탓인지, 오늘 뱃불은 그 어느 빛보다 환하다. 핸드폰이 더위를 먹었는 지, 켜지질 않는다. 그런데, 왠지 좋아.

 

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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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기 전, 오랜만에 농기구를 깨끗이 닦고 말리고, 마당을 정리했다. 난장이콩과 봉선화, 로마네스코 씨앗을 뿌렸다. 주홍색 제라늄 꽃이 피었다. 

 

7/20-25 일본 여행 (혹은 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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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사키 씨, 모리사키 씨, 나츠미 씨, 하야시 씨, 이나바 씨, 다이스케 씨, 모두 감사합니다. 사운드 엔지니어로, 스탭으로, 바의 운영자로, 레이블 직원으로, 음식점 셰프이자 뮤지션으로, 모두 다른 직업을 갖고 계신 분들이지만, 한결 같이 음악을 사랑하는 분들을 만난 덕분에 저는 조금도 서먹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하야시씨와 이나바씨. 귀한 음악 선물, 책 선물 고맙습니다. 제가 드린 제주산 네잎 클로버가 조금이라도 보답이 됐을까요. 곧 새 앨범이 일본에도 나오고 공연이든 여행이든 다음에는 더 긴 시간 함께 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에게 소개해주고 싶으시다는 Carlos Aguirre 씨도, Nakajima Nobuyuki 씨도, 만날 날이 오겠지요. Ito Goro 씨도 한 번 더 뵐 수 있겠지요. 그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7/26

집에 오니, 제비들은 모두 날아가 버렸어.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양어장집 꼬마 강아지가 죽었다고 했어. 고사리처럼 꼬리가 말린, 하얀 백구였어. 옆집 할아버지의 차에 치였다고 했어. 언젠가 보현이가 강아지에게 왕왕댔을 때, 보현이를 매우 야단치던 생각이 났어. 겁에 질려 집으로 쏜 살 같이 들어가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아. 강정 과수원 앞에서 싸늘하게 누워있던 백구도 생각이 나. 새벽 이슬을 맞은 몸에 수건을 덮어주고 과수원 한 켠에 묻어줬었지. 시골 마을의 로드킬은 드문 일이 아니다. 평생을 묶여 사는 개들은 로드킬을 당할 이유는 없지만, 풀어 놓고 키우는 어린 강아지들은 이렇게 사고를 당한다. 매인 자의 삶 그리고 매여있지 않은 자의 죽음, 그 사이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걸까.

나리가 동화 일러스트 데모를 몇 편 보내주었다.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을 고스란히 그려준 것 같다. 그리고, 제비 한 쌍이 현관 벽에 집을 짓고 있다. 오, 신혼부부. 환영합니다. 집 값 걱정마시고 어서들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