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천장에 종이새를 달았다. EM-B를 포장하고, 태풍 단도리를 하고 왔다. 수레와 분무기와 액비통을 창고 안으로 들여놓았다.
7/2
태풍이 온다고 하지만, 세상은 너무나 똑같구나. 이것봐. 너무나 평온해.
몇 십 년만에 조깅을 했다. 해가 떨어지지 않은 뜨거운 트랙을 돌고 또 돌았다. 심장은 터질 것 같은데, 목과 어깨가 신기할 정도로 편안해진다. 잠시나마 손가락을 잊었다. 그리고 무지개가 보인다.
7/3
손가락이 여전히 펴지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에 다시 갔다.
이주 만에 엑스레이를 다시 찍은 뒤, 선생님은,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전에 준 부목은 잘 하고 계셨어요? 아, 네... 할 때도 있고 일 할 땐 또 벗어놔야해서. 이건 그냥 핀 고정술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소견서를 써 드릴테니까,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아주 수술을 잘 하시는 선생님을 찾으셔야 합니다. 혹시... 수술 외엔 방법이 없는 건가요? 네.
내 눈으로는 엑스레이 사진의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는 지 도무지 알 수가 없지만, 아무튼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다는 거다. 병원 대기실은 할머니 할아버지들로 북새통이다. 멍청하게 앉아 소견서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줄곧 한 가지만 생각했다. 공연. 공연은 어떻게 하지.
다올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래도 공연이 힘들 수도 있겠다는 언질을 주었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할까. 도내 종합 병원 몇 군데에 전화를 걸어서 진료를 봐줄 선생님을 찾다가, 몇년 전 손가락 수술을 했던 희열 형에게 연락을 했다. 그리고, 원우형에게 다시 연락을 했다. 형은 잠시만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모슬포로 가는 길. 나는 왜 모슬포로 가고 있을까. 모르겠다. 원우형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엠알아이를 먼저 찍어봐야할 듯하니 내일이라도 당장 서울로 올라오라고 한다. 예상할 수도 없고 겪어보지도 못한, 그저 꽤 큰 일이 일어난 것 같다는 예감만 어렴풋이 들었다. 내 몸의 가장 끄트머리에서 끊임없이 나를 위해 움직여주는 그 어딘가에, 큰 일이 일어났다. 포구에 늘어선 횟집 중 아무 곳에나 들어가 한치회 정식을 시켜놓고 먹는 둥 마는 둥 허기만 겨우 채우고 서울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7/4
서울에 가서 MRI를 찍다. 영상의학과 선생님이, 제주에서 오셨어요? 물으며, 전 모슬포가 고향입니다, 하신다. 아, 어제 저도 모슬포에 다녀왔는데... 네. 멀리서 오셨네요. 손가락은 핀 고정술을 하셔야겠습니다.
공연은 취소다.
지금의 나에겐 별 의미 없는 일이 됐지만, 이상하게 이 날은 매년 기억이 난다. 수년 전, 로잔에서 defense를 했던 날이다.
7/5
아침 일찍부터 검사를 하고, 사진을 찍고, 오후에 수술을 하기로 하다. 처음 누워본 종합병원의 수술침대. 수술실에는 단속적인 전자음와 기계음만 들린다. 마취주사는 생각보다 아프고, 또 아프지 않다. 아무 느낌도 없는 내 손가락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내 뇌는 알 수 없게 되었다. 한두 시간을 지나, 회복실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주 먼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다가온다. 뭐라고 정의해야할 지 모를, 그 무엇이, 점점 큰 통증으로 변한다. 이제 느껴진다.
7/6
손이 많이 부었다. 잠은 자는 둥 마는 둥. 일어나자마자 타이레놀부터 허겁지겁 먹다. 결국 견디다 못해 근처 병원에 무작정 들어가 진통제를 처방 받아왔다.
약을 털어넣으니 아주 조금, 살 것 같다. 그런데 선생님은 왜 진통제 처방을 안 해주셨을까.
7/7
항생제 덕인지, 몸이 깨끗해진 것 같다. 몸에서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7/8
오늘도 씻지 않았다. 운전을 할 수 없으니 무척 답답하고, 아내에게 미안하다. 손가락을 뺀 온 몸의 통증이 사라진 것 같다.
7/9
제비들이 날기 연습을 시작하였다. 아내가 손톱을 깎아주었다. 언제까지가 될 지 모르겠지만, 당분간 기타 칠 일이 없으므로.
7/10
서울행. 서울 부모님과 저녁을 먹었다. 아무래도 직접 보여드리는 게 낫겠다 싶다.
7/11
진료를 받다. 손가락에 박힌 철심 세 개의 끝을 보았다. 항생제는 그만 먹기로 하다.
7/12
새벽 일찍 차를 마셨다. 얼마만인지.
동원씨 커플이 와서 예초와 밭 일을 도와주었다. 비료 25 포대를 밭에 부려두었다.
붓기가 많이 빠지고 있다.
수정씨가 손수 키운 감자와 편지를 보내주었다. 형형색색의 감자알이 조약돌 같다.
7/13
운전을 할 수 없어 택시를 타고 오두막에 갔다. 오디오 인터페이스에 문제가 있어서 서울로 보냈다.
보현의 밥을 만들었다.
7/14
동원씨 커플과 비료 21 포대를 뿌리다. 골분 25 포대를 주문했다.
제비들이 둥지를 떠난 것 같다.
7/15
태현씨가 일을 도와주러 오다. 태현씨가 예초를 하는 동안 남은 비료 3 포대를 마저 뿌렸다. 일을 하던 중, 예초기 연료탱크 뚜껑이 사라졌는데, 어디에서 태현씨가 들고온 T.O.P. 뚜껑으로 대충 입구를 틀어막고 일을 했다. 유정씨 부부가 오두막에 놀러왔다.
집에 돌아오니, 제비 한 마리가 물끄러미 나를 보다 날아갔다.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걸까.
음표가 머릿속에 떠다니지만 세 손가락으론 다 붙들 수가 없다는 Django의 말이 생각나는 요즘이다.
우리 동네 제순이 제돌이
모두모두 먼곳으로 떠났네
남쪽나라 무사히 다녀오렴
내년에 또 다시 만나요. 짜이젠!
제비에 관한 짧은 노래 하나를 만들다.
7/16
결국 예초는 포기. 남은 비료를 마저 뿌렸다.
농자재 구매내역서를 끊고, 예초기 청소를 하고, 골분 500 kg를 받아두고, 액비 돌돌이를 청소하고, 내일 방제 준비를 하다.
7/17
3:30 기상. 4:10 밭으로. 4:40 밭에 도착. 세팅 시작. 5:00 세팅 완료.
아침 식사와 끽차. 6:10 방제 시작.
아내 혼자 방제를 하고 나는 속칭 '줄잡이' 밖에 할 것이 없다. 2000 리터 방제할 것을 네 번에 나눠서 하기로 하고, 500 리터에 보르도액 한 봉지 (5kg)와 기계유 유제 2.5L 를 섞어서 꼼꼼히 방제. 센 수압으로 선녀벌레와 깍지벌레를 날려버린다. 8:40 방제 마치다.
선녀벌레 약충이 많이 보인다. 귤애가루 깍지벌레를 우리 밭에서 처음 보다.
갈색으로 말라버린 어린 열매가 드문드문 보인다. 이건 다 잿빛곰팡이의 소행입니다.
7/18
동원씨 커플 오다. 예초중 예초기가 또 말썽을 부려 읍내 전문점에 갔다. 캬브레타도 문제가 없고...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버렸다. 또 문제가 생기면 날을 바꿔야겠다. 그러는 사이 남근 형님의 전화가 와서 차를 빼주러 집으로 갔다가 다시 밭으로.
골분 500 킬로 뿌리고 그럭저럭 예초를 마무리하다. 내일 작업 준비해두고 귀가.
7/19
2차 방제. (2.5 L 기계유유제 + 5 kg 보르도액 mixture in 500 L) 모터가 불안하게 또 꺼져버리다. 작업 후에 일어난 일이라 다행이다.
여기저기 모터 수리를 알아보다 농협으로 갔다. 모터 수리는 어렵다고 했지만 분무기의 물 새는 것을 속시원하게 고쳐주셨다. (4500₩) 기계상사 사장님께 연락을 드리니 모터를 보러 내일 오신다고 한다. 한전에 연락을 해서 삼상 전기가 혹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 지 점검을 했지만, 이상이 없다고 한다.
7/20
기계상사 사장님 오셔서 전기 점검을 했다. 전기 소스의 문제는 아니고 컨센트 접속부위가 좋지않은 듯 하다. 콘센트를 열고 연결 부위를 조였다. 다행이 모터가 타버리거나 큰 고장이 난 것 같지는 않다. 결국 이 접속 문제 때문에 손을 다친 거로구나. 이렇게 또 하나를 몸으로 배우고 지나간다.
보르도액을 사두다. 보현이 얼마나 일광욕을 좋아하는 지, 이제야 알게되다니. 이 더운 날에도 햇살 아래에서 그렇게 행복해할 수가 없다.
7/21
보현과 마당에 앉아서 누워서 함께 햇살을 맞는다. 보현아. 아빠도 일광욕이 좋아졌어. 언제까지나 오래오래 이럴 수 있다면 좋겠다.
액비 관주 7통과 물 관주 2통을 하다. 남은 EM-B는 3통 반이다. 실수로 필터 끝 밸브를 깨먹었다. 왜 이렇게 덜렁대나.
방제할 호스를 정리해 두었다. 선명씨 부부가 놀러 왔다. 물 500 리터 받고 분무기에 윤활유를 채워넣었다. 손 마디가 아려서 다시 진통소염제를 먹기 시작했다.
6천평 농사를 하신다는 어떤 분이 밭을 지나며 한 마디 하신다. 친환경? 몇년 그렇게 농사하면 나무들 다 말라 죽어.
뭐라 대꾸를 해야할 지 몰라서 그냥 인사만 하고 돌아섰다.
7/22
밸브를 교체하다. 380V 전기 콘센트의 경첩을 교체하려다 비가 와서 두다. 모처럼 바람이 거세고 실비가 내리다.
손가락이 나빠지는 꿈을 꾸었다.
7/23
저탄소 인증 사무원들이 방문하셨다. 3차 방제 (1, 2차와 같다). 컨센트 경첩을 수리하였다.
일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 믿고 싶지 않은 뉴스를 보았다.
용기 있는 자는 왜 항상 먼저 떠나는가.
세상은 왜 희생으로만 움직이는가.
너희가 그를 죽였다.
7/24
마지막 방제.
방제를 마치고 골분 1kg in 현미식초 10L를 섞어 유기 칼슘 제조를 시작했다. 더듬더듬 손예초를 했다.
다올과 친구가 와서 저녁과 술을 사주었다.
제비들 다시 집으로 날아들다.
꿀벌과 말벌의 이야기. 동물의 이타심에 대해 읽다.
7/25
내 손으로 예초기를 돌리고 싶다.
포크와 나이프로 밥을 먹고 싶다.
기타를 치고 싶다.
운동이 하고 싶다.
목욕이 하고 싶다.
손가락은 잘 회복되고 있단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다. 한시간 반이 걸리는 동안, 여지껏 못 보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7/26
노회찬 의원의 빈소에 조문을 하고 오다.
커피를 마시고, 작업실로 왔다.
그저께 만들기 시작한 유기 칼슘 용액에 패화석 1 kg를 추가하였다.
일찬씨가 오두막에 와서 얘기를 나누고 돌아갔다.
7/27
제비집 아래에 판자를 대어주었다. 제비새끼들이 몇 번 떨어진 후 늘 조마조마했는데, 내년에 오히려 낯설어 하려나.
Bricasti M7의 리버브 소리가, 놀랍다.
갑자기 네비게이션이 고장이 났다. 날이 너무 더웠나.
7/28
아내의 생일.
동네 산책을 했다. 노회찬 의원이 꿈에 나왔다.
7/29
집안 구석구석 '딥 청소'를 하다.
동진을 길거리에서 만나서 공연장까지 데려다 주다. 요즘 같은 컨디션에 공연을 보러 갈 정신이 있으려나 모르겠다.
7/30
숲길을 걸었다.
대정이와 저녁을 먹다.
7/31
동진과 저녁을 먹다. 오두막에 가서 전기 점검을 하다.
물 관주를 두 시간 정도 해주다. 소포를 보내고 돌아왔다.
닉네임 말하길:
제순이 제돌이 짜이쩬 노래 정말 궁금하고 듣고 싶네요. 해적방송 읽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올려주신 노래에선 뮤지션들의 손만 쳐다보았습니다.
2018년 11월 5일 — 9:19 오전
이파네마 말하길:
클래식피아노 전공하려던 시절이 있어서 손에 생긴 되게 작은 상처나 베임에도 하루종일 의기소침해하는데 저 곱디 고운 귀한 손가락이ㅠㅠ 아직 듣지못한 팔월 구월 시월의 얘기에는 조금더 나은 상황이길 빕니다.
2018년 10월 31일 — 9:44 오전
camel 말하길:
과거의 고통이라 그나마 안도하면서 폴님 글을 읽어내렸습니다.의도…하신건가… 생각해봅니다.굽은손, 용기 있는 자의 죽음, 접촉 불량의 콘센트,고장이 잦은 모터, 새로운 풍경… 연결 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묘하게 엮여 슬픕니다.가을이라기엔 오늘은 추웠습니다. 곧 뜨거운 여름의 빛으로 찬란하게 빛날 귤나무를 떠올리며 폴님의8월의 일기를 기다리겠습니다. 폴님의 날개가 생각나는 날입니다. 고맙습니다!
2018년 10월 30일 — 6:16 오후
MJ 말하길:
폴님 소식을 엄청 기다리다가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생각이 났습니다.무소식이여도 좋습니다. 무탈하시기를 바랍니다~폴~
2018년 10월 29일 — 10:37 오전
nicholas 말하길:
고단하고 속상하고 힘들었던 시간들을 지나,
이제는 투명한 가을 햇살 아래서
반듯하게 펴진 손가락을 비춰보며
하루 하루 회복 되어감에
감사하고 안도하는 폴님을 간절히 그려봅니다.
꼭 그럴 것이라고 믿고 싶네요…
2018년 10월 24일 — 10:12 오후
상한 영혼 말하길:
이미 3달 가까이 지난 이야기인데도 가슴이 저릿한 부분들이 있어 몇번이나 멈칫멈칫 스크롤 내리는 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네요. 무슨 말을 남겨야 할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폴님이 항상 평안하시기를, 조금이라도 덜 아프시길 바랄게요.
2018년 10월 24일 — 9:46 오후
20498 말하길:
7월 일기를 보다 마음 한 켠이 저릿해지더군요.
폴님의 시선이 닿았던 모든 풍경의 결들이 평화로워지기를 바라는,
담담한 진심을 담아 인사 전합니다. -nemo.
2018년 10월 23일 — 4:01 오후
vert 말하길:
올려주신 노래들 반복해 들으면서 가을볕을 쬐고 있습니다. 7월의 기록이니, 그 때보다는 조금 덜 아프고 조금 덜 불편하게 지내고 계시리라 믿어요. 지난 여름에 느끼셨던 감정과 그 때의 마음들을 다 가늠할 수는 없겠지만, 어떠셨을까 생각하며 잘 따라가보았어요. 언제나처럼 저는 폴님의 노래를 들으며, 글을 읽으며 그렇게 지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늘 고맙습니다. 안녕하시기를 바라며 :-)
2018년 10월 23일 — 3:41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