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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31

5/1

비오는 날. 집 앞 바닷가에는 노란 안경을 쓴 듯한 얼굴의 꼬마 물떼새가 서성거린다.

 

5/2

꽃은 5%정도 피었을까. 역시나 우리 밭은 꽃이 늦게 온다. 순도 늦고 열매도 늦다.

안개가 낀 하루. 빗방울이 옅게 흩날린다. 일년 넘게 방치되다시피한 옆 땅을 갈고, 꽃씨를 뿌렸다. 나는 오늘 태어나서 제일 많은 꽃씨를 뿌렸다. 

약해진 나무에 복합 비료를 나눠 뿌리고, 역시 내버려진 수도꼭지에 호스를 연결했다. 밭일을 마치고 white noise로 몇 가지 test를 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Luz Casal보다 우아한 중년의 목소리는 상상이 안 된다.

 

5/3

아침 과수원. 누가 버리고 갔는 지 찢긴 비닐 봉지와 아이 기저귀와 먹다 남은 과일 껍질이 나딍군다. 과수원 옆 현장 일꾼들이 먹은 빵봉지며 담배 꽁초며 소주병도 나무 밑에 굴러다닌다. 그저 주워담는 수 밖에. 블렌더로 간 청국장 800gr (실은 조금 더) + EM 원액 2 L + 당밀 2 통 in 200 L. 40도에서 열흘 발효. 올해 첫 액비 제조를 시작했다. 작년에 만들어 둔 액비를 마저 점적 관수 해주었다 (50배 희석, 3000 L). 가는 비가 흩날린다.

해가 거듭될 수록 과수원의 식생도 변해간다. 올해엔 유독 덩굴들이 많다. 무어라도 간절히 붙잡으려는 덩굴손이 위로 죽 뻗은 모습을 보면, 식물이 아닌 동물 같다 싶은 때도 있다. 그러다 보니 무슨 일을 하든 틈이 나면 덩굴을 걷어내는 게 올해 제일 큰 일이다.

보현과 기분좋게 산책을 했다.

저녁 햇살이 아름다워 사진을 찍었다.

 

5/4

아내는 돈나무 꽃을 따고, 나는 마당의 풀을 뽑고, 우리가 정원 일을 하는 사이 보현은 일광욕을 즐기다. 

 

5/5

어린이날. 하루 종일 보현과 시간을 보내기로 하고, 산책을 다녀왔다가 낮잠을 잤다.

과수원에 가서 손 톱과 전정가위를 가지고 집에 왔다. 창고 두꺼비집이 또 내려가버렸다. 액비 발효에 쓰는 5kW 짜리 열탕기의 전력량이 너무 커서 그런 것 같다.

 

5/6

비가 엄청나게 쏟아진다. 남근 형님께서 케이크를 선물해주셨다. 제주에 놀러온 용린이를 동네 식당에서 잠시 만났다.

 

5/7

아침에도 비가 매섭게 내린다. 물총새 한 마리가 집 앞에 보인다. 동네 경로잔치에 갔다. 아침 10시인데 벌써부터 분위기가 달아오른 것이 이미 한낮이 한참은 지난 분위기이다. 부녀회장님께 어르신들 용돈을 드리고, 무대에 올라가서 인사를 꾸벅하고 돌아왔다. 이장 형님이, '노래 못하는 가수'라고 나를 소개하셔서, 다행히 노래를 안 하고 내려올 수 있었다.

오후에는 열탕기를 3 kW 짜리로 바꾸고 다시 발효를 시작했다. 여기저기 꽃 싹이 텄다. 비가 잦은 만큼 움도 잘 텄다. 수국 이파리에 거뭇거뭇한 점이 보였다. 보르도액 약해를 입은 건 아닐까. 조심해야 겠다.

저녁에 용린과 그의 후배를 만나 같이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

 

5/8

귤꽃이 얼추 50에서 60% 핀 것 같다. 일 년중 과수원이 가장 찬란해질 때다. 경환이네 가족이 와서 점심을 같이 먹었다. 아이들과 함께 오는 손님 대접에는 돈가스만한 게 없다. 점심을 먹고 과수원에서 같이 적화를 조금 하다가 헤어졌다. 나는 다섯잎 클로버 하나를 찾아서 선물로 주었다. 

내일 작업할 보르도액 두 포를 사왔다. 일본제 IC 보르도액이 침전도 적고 boron 같은 미량원소도 들어있어서 좋은 것 같은데, 국산에 비해 조금 비싸다. 밤에는 상순이네에 가서 마이크 테스트를 하고 돌아왔다. 좋은 장비를 샀구나.

 

5/9

'믿어버리겠다' 마음은, 믿음이 아니지. 결국 깨지니까.

기계유 5L + IC 보르도액 두 포 (10킬로) in 1000 L. 엽면 방제하다. 흡입구 청소를 미리 해둔 것이 잘했다 싶다. 약제가 고르게 퍼지도록, 500 L 물을 먼저 받고, 약제를 넣고, 물을 마저 다 받고 압을 걸어서 한 시간 가량 충분히 섞는다. 그리고 방제 시작.

한참 일을 하는데 기계상사 사장님께서 전화가 온다. 지금 밭에 있어요? 네. 약 치고 있는데요. 아, 그러면 지금 그리로 갈게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밭에 정말 오셨다. 일을 잠시 멈추고 사장님과 얘기를 하려는데, 기다리시겠단다. 약 마저 치세요. 그거 중간에 멈추면 안 되잖아, 하면서 어디론가 사라져주신다.

일을 끝낼 무렵, 사장님은 새 예초기와 충전식 톱을 들고 오셨다. 관청에 제출할 인증샷을 찍고, 여느 때처럼 하나하나 사용법을 설명해주신다. 한 번 해보세요. 실습까지 해주시더니 음료수 한 잔도 안 하시고 트럭을 타고 휑 돌아가셨다.

타고난 선생님인 이 분을 만날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가르치는 재능이란 이런 거구나. 다른 사람의 서투름에 공감하는 힘.

햇고사리로 파스타를 해먹었다.

 

5/10

작년에 심은 낮달맞이 꽃이 드디어 핀다. 병원에 들렀다, 트럭을 맡기고 돌아왔다. 비만 오면 시동이 걸리지 않는 증상인데, 수리를 받아봐도 비만 오면 또 똑같다. 어딘가 비가 새서 엔진이 젖는 것 같은데 어디가 어떻게 새는 지는 또 아무도 찾지 못한다. 

저탄소 농산물 인증 심사에 통과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5/11

EM-B 네 통을 관주 (50배, 1000L 씩). 발효가 한창인 액비 통 주변에는 초파리가 몰려들어서 먹고 마시고 페스티벌을 벌이고 있다. 어느새 과수원 옆 타운하우스가 이층까지 올라갔다. 결국 오두막 이층에도 커튼을 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수세가 약한 나무를 살펴 적화를 해주었다.

 

5/12

타운하우스는 세 동이 더 들어설 거라고 한다. 하루종일 포크레인이 땅을 파고 돌을 깨부순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만든 집에서 살아간다. 내가 사는 이 집터의 전생은 무엇이었을까. 밭이었을까. 현무암 가득한 바다였을까. 내가 살기전, 아니 사람이 살기 전에 여기엔 누구의 집이 있었을까. 

경계에 심겨진 커다란 동백나무들이 돌틈에 묻히고 있다. 나무의 턱밑까지 돌이 찼다. 너희들이 이 난리에도 씩씩하게 살아내줄까. 응. 그래야 한다. 

스산하기만한 하루. 나는 숲으로 갔다. 무당벌레 유충들이 몸을 잔뜩 웅크리고 어른이 될 준비를 한다. 그렇게 기다리던 시디들이 도착했다. Carlos Aguirre와 Quique Sinesi와 Aca Seca Trio의 새 앨범들이 약속이나 한 듯 비슷한 시기에 찾아왔다. 기타 연습을 했다.

 

5/13

연습.

 

5/14

연습.

어른이 되고 나서 처음 충치치료를 했다. 생각보다 별 것 아닌데. 

8월 공연 셋리스트를 정하기 시작. 1집부터 지금까지, 찬찬히 돌이켜보는 무대는 어떨까. 오래오래 묵은 오케스트레이션 악보를 다시 찾아 정리했다.

 

5/15

오두막 전기 테스트를 했다. 다행히 접지 상태는 좋은 듯 하다. 기계상사에가서 자원금 관련서류에 도장을 찍고 왔다. 레몬꽃이 피었다.

말벌이 오두막 어딘가에 꿀을 모으고 있는 것 같다(!)는 첩보가 들어왔다(아내로부터). 가서 보니 옴폭 패인 계단 곳곳에 찐득한 액체가 말라있다. 요즘 과수원에 자주 보이는, 다리를 축 늘어 뜨리고 느릿느릿 날아다니는 벌인데, 제주 왕바다리라는 재밌는 이름을 가진 벌이다. 꿀벌보다 커서 꽤 무섭기도 한데, 알고보니 말벌보다 훨씬 온순하며 심지어 많은 해충의 천적이기도 하단다. 말벌과이긴 하지만 고유종 쌍살벌이다.

누나네 부부와 보현을 데리고 바닷가 산책을 하고 함께 저녁을 먹었다.  

 

5/16

새 예초기로 풀을 벴다. 어깨 멜빵이 나름 업그레이드 되었는데, 편하기도 하면서 또 불편하기도 하다. 그새 귤꽃이 꽤 많이 졌다. 코스모스와 유채 싹이 빼곡히 올라왔다. 

깨끗이 창고 청소를 하고, EM-B를 통에 옮겨 담았다. 

오두막에서 기타를 가져오다. 어머니를 공항서 모시고 와서 그렇게 드시고 싶어하던 자리 물회를 사드렸다.

 

5/17

서울행. 낮술을 한 잔씩 하며 기분좋게 연습을 하고,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고, 사무실에서 공연 회의를 했다.

장대비를 뚫고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고모할머니를 뵙고 돌아왔다. 신발이 흠뻑 젖었다.

 

5/18

아침일찍부터 숙모님께서 신발을 하나하나 다 드라이어로 말려놓으셨다.

숙소에서 잠시 쉬다가 리허설을 하러 갔다. 밤 날씨가 너무너무 춥다. 내일, 관객들이 춥지 않아야 할텐데.

 

5/19

SJF 2018 - 루시드폴 with 조윤성 & 황호규 

  1. 봄눈

  2. 명왕성

  3. 바람, 어디에서 부는 지

  4. 그대는 나즈막히

  5. 4월의 춤

  6. 아직, 있다.

  7. danza sin fin 

  8. 바다처럼 그렇게

  9. 은하철도의 밤

  10. 어부가

  11. 고등어

encore. 그럴 거에요

'아직, 있다.'를 부를 때, 어디선가 새 떼가 몰려 날아가고 물오리 두 마리가 빙글대며 춤을 추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오래 기억에 남을 공연이 되었다.

미선이 시절 매니저였던 지숙 누나를 백스테이지에서 만났다. 윤성씨, 호규와 조촐한 뒷풀이를 했다. 공연이며 사운드며 나는 여전히 뭔가 아쉬워했고, 윤성씨는 계속 우리 잘 했다, 고 말해주었다. 갈수록 내 무대에 쉽게 만족하지 못하는 건, 다행이고 또 불행이다. 

 

5/20

다알리아가 피었다. 며칠 집을 비우고 돌아올 때마다, 마당에는 어김없이 새 꽃이 피어 날 반겨준다. 며칠 사이 앵두가 빨갛고 터질 듯이 익었다. 첫 해엔 열리지도 않았던 앵두가 이젠 해거리도 없이 이렇게 봄과 여름의 사이를 풍성하게 지켜준다.

거센 바람에 대문이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찔레도 낮달맞이 꽃도 만발했다. 산수국이 빼곰히 피었다. 오랜만에 보현과 걸었다.

 

5/21

실비가 내린다. 병원에 갔다가, 어머니를 공항에 모셔다 드리고 돌아왔다.

숲에서 하얀 가시엉겅퀴를 보았다.

 

5/22

꿈을 꾸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넓고 푸른 바닷가를 바라보는 그런 꿈이었다. 

내일 밤 비소식이다. 꽃은 이미 다 졌건만, 잿빛곰팡이 방제를 언제 해야할까.

오일장에 가서 벤자리 두 마리와 손가락만한 멜 오천원 어치를 사왔다. 멜을 보니 봄이 왔구나, 싶다가 벤자리를 보고는 , 아, 벌써 여름이구나, 싶었다. 장에서 데려온 꽃과 풀을 마당에 심었다.

두려워하지도 걱정하지도 말 것.

용서해줄 것. 나부터.

 

5/23

아침까지 비가오다 개다. 밭에는 싹이 엄청나게 돋았다.

잠시 밭을 비운 한 주 사이에 더뎅이병 포자가 퍼져서 당황스럽다. 연한 새순과 이파리가 온통 오돌토돌하다. 방제를 해도 빗물에 다 씻겨 내려가는 건가.올 봄 무사히 넘어가려나 했던 진딧물도 많다. 이건 별 걱정거리는 아니지만.

수정씨가 선물을 들고 집에 찾아왔다. 조그마한 커피 콩 로스터 도구인데, 일본인 발명가 분이 만든 거란다.

 

5/24

과수원 일을 배우러 왔다지만, 수정씨에게 시킬 일이 딱히 없어서 수정씨에게 적화를 부탁하고, 우리는 예정대로 잿빛 곰팡이 방제를 했다. 아미노 2L + EM-B 5L + 키토 목초 5L in 1000L. 이른 점심을 먹고 일을 시작했는데, 이젠 이 시간엔 방제가 불가능하겠다 싶다. 너무 덥다.

누런 이파리를 보면서 곰곰히 생각한다. 왜 갑자기 더뎅이병이 들이 닥쳤나. 토양 검정 결과처럼 유기질이 너무 많은가. 그래서 나무의 영양 성장이 너무 빨랐던 걸까.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어쩔 수 없단다. 비가 많은 날씨 때문에 진딧물과 창가병이 많이 돈다고. 그건 어쩔 수 없단다. 더뎅이병의 포자는, 실은 지금의 것이 아니다. 한 해 전부터 곳곳에 숨어 있던 포자가 빗방울과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발현한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앙상했던 나무에 돋은 이파리는 깨끗하다. 농사만큼 생생하게 카르마를 느끼게하는 것이 또 있을까. 

 

5/25

앵두를 다 땄다. 수정씨가 편지를 한 장 남겨두고 돌아갔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내가 한 것이라고는 우리의 일상을 '나눠준' 것 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도, 또 누군가에겐 선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카메라 수리를 맡기고, 승환 공연을 보았다. 걷기 좋은 밤 날씨였다.

번역가 정영목 씨의 인터뷰를 읽었다. "잘 읽히는 번역 나쁜 번역일 수 있다"는 기사의 중간 제목은, 꽤 자극적인만큼 또 무슨 뜻인지도 잘 알겠다.

어색하고 낯설고 생경한 면을 통해 우리의 현실 속에 어떤 것이 없음을 알려주고, 또 바깥에서 온 언어가 우리의 현실과 어딘가 어긋나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번역의 역할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는 '번역'을 '노래'로 바꿔 본다.

 

5/26

마음 지도를 그려보았다. 감정을 분해하는 것 만으로도 나는 객관화되고, 그것만으로도 평안해 질 수 있다. Oh, Spinoza.

지영의 식당 개업식에 갔다. 대견하다. 덕분에 참 많은 사람들을 오랜만에 보았다. 작은 선물 몇 가지를 건네주고, 다같이 밥을 먹고 맥주 한 잔을 하고 노래를 듣고, 식혜 한 병을 얻어들고, 우리는 밤길을 달려 돌아왔다.

 

5/27

운동하고 쉬다.

 

5/28

실비가 내리는 날. 덩쿨 정리를 하고 액비를 만들어서 집에 오다. 올해는 노린재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대신, 달팽이와 콩벌레가 무척 많아졌다.

 

5/29

집의 나무와 화초에 엽면 시비를 해주었다. 

 

5/30

병원에 들렀다가,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러 중산간 어드메 카페를 찾았다.

모두가 수리를 포기(내지는 거부)한 트럭을 찾아 왔다. 에라 모르겠다. 비가 오면 그냥 무조건 쉬자. 너도, 나도.

목이 아프다. 요가를 아주 길게하였다.

 

5/31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서, 이제 곧 귤굴나방도 올테고, 5월 말 방제를 어떻게 할까요 여쭤보았다. 기계유를 절반으로 줄여서 보르도액과 함께 방제해라. 창가병은 어쩔 수가 없다, 고 다시 말씀하신다. 올 봄 유독 잦은 비와 낮은 기온 때문에 양봉을 하는 분들도 낭패를 보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비가오면 꿀벌은 날 수가 없으니, 어쩌면 과수 농가들도 긴장을 해야할 지 모르겠다. 벌에 대한 책을 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