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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30

4/1

April fools' day.

현장 리허설.

 

4/2

보현과 숲에 갔다. 숲길 끝에 하얀 꽃이 한 무리 피어 있었다. 향기를 맡으러 무릎을 꿇어보았다. 생각치도 못한 짙은 향이 난다. 오후에는 아이들을 만나 현장 리허설을 하고, 짧은 인터뷰를 하고, 저녁을 먹었다. 

 

4/3

평화 공원의 초입부터 벚꽃은 절정으로 피었다. 이 때가 이렇게 아름다웠나. 기억 속의 오늘은 늘 비가 오고 진눈깨비가 날리던 그런 날이었는데.

벌써 4년 전이다. 처음 이 곳에 왔던 그 여름날, 운동장보다 큰 주차장에는 차 한 대 없고, 텅빈 광장에는 사람들의 싯구만 가득했었지. 그 날, 끝도 없이 가지런히 늘어선 비석과, 비석 아래 누워 어딘가 이미 떠난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살던 숱한 동네 이름만 무한정 적힌, 돌 숲 같던 이 곳. 인기척이란 없고 온통 바람 소리, 까마귀 소리만 들렸었지.

오늘은 사람이 참 많구나. 손에 손에 무언가를 들고 공원을 오르는 사람들. 교복을 입은 사람들. 무채색 정장을 입은 사람들. 모두의 옷깃에 붉은 동백 뱃지가 찍혀있다. 추념식장으로, 위령탑으로, 비석으로 향하는 사람들. 두 살 때 부모님을 여의었다는,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70 대의 아이가 술잔을 건네는, 이 화창한 날. 

그런데 멀리 눈에 익은 어르신이 보인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어쩐 일로. 아, 네. 아버님 산소도 가보고 하러. 선생님은 나를 못 알아 보시는 눈치다. 정장 차림에 메이크업까지 했으니 못알아보실 만도 하겠다. 

우리는 연주와 노래를 하고, 작은 미니버스 한 대를 타고, 산길을 둘러둘러 달렸다. 그러다보니 멀리 바다가 보인다. 물안개 자욱한 탑동 어느 호텔 앞에 내린 우리는 티비에서나 보던 온갖 정치인들 틈에 섞여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서울서 보낸 세탁기를 집에 내려 놓으러 정신없이 집으로 왔다가 잠시 쉬고, 진수와 동진과 오두막에서 음악을 들으며 놀다가 아이들과 저녁을 먹었다.

 

4/4

전정한 가지를 파쇄하기 좋은 곳으로 옮겨 모았다. 배꽃이 핀 줄도 모르고 있었구나. 밭에서 10분 거리에 리뉴얼한 농협 목욕탕에 가서 몸을 씻었다. 근 10 년 간 쓰던 세탁기를 동물보호소에 전해드렸다. 그리고 비가 내린다.

 

4/5

증명 사진을 찾고, 주민등록증 신청을 하고, 택배를 보내고, 세탁소에서 옷을 찾고, 세탁기 호스를 주문하고, 범수형과 통화를 했다.

 

4/6

미세먼지가 자욱하다. 날이 다시 추워져 내복을 꺼내 입었다. 칠레에서 보낸 장비가 몇 달 만에 도착했다. 늦게까지 오두막에 남아 작업을 했다.

 

4/7

중산간에는 눈이 내린다. 몹시 추워진 날씨에 파카를 껴입고 산책을 나갔다. 나는 우리 나무들이 걱정 된다.

세월을 이기는 방식은, 오직 깊어지는 것 뿐.

 

4/8

가지를 다 옮겨 모아두었다. 날이 다시 따뜻해 진 듯 하지만, 난로를 피웠다. 왠지 그러고 싶었다.

숲에는 어김없이 탱자꽃, 으름꽃, 제비꽃, 초피꽃, 덧나무꽃이 왔다.

과수원 건너편 공사 현장에서는 온갖 굉음이 몰려왔다. 이제 우리 밭에 반딧불이가 안 올지도 몰라, 아내가 말했다.

 

4/9

과수원에 핀 보랏빛 꽃 이름을 아내가 가르쳐 주었다. 마스터링을 하고 돌아왔다. 참으로 간만에 밤바다에 뜬 뱃불을 보았다.

동네를 찾은 제비들이 눈에 띄게 적어졌다. 어제까지 당연하던 것이, 오늘도 여전히 그런 지, 계속 물어보지 않으면 안될 때가 있다.

 

4/10

아침 6시까지 늦잠을 자고, 기술센터에서 기계를 빌려 파쇄를 시작했다. 그 사이 가지가 말라버린지라 파쇄하기 조금 더 힘들다. 파쇄목이 그득그득 쌓인 곳을 들추니 생각보다 꽤 빨리 그리고 천천히 흙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렇게 십수년을 함께 하면, 조금은 더 숲에 가까워질까. 풀 한 포기 없이 드문드문 이끼만 있던 이 밭도 조금씩이나마 이렇게 달라지고 있다.

 

4/11

오후를 조금 지나서 파쇄를 다 마쳤다. 점심 시간에 마스터링 화일을 받아서 수정을 하고, 파쇄기를 반납하고 내일까지 기계를 쓸 필요가 없게 되어 하루치 렌탈료를 환불 받기로 했다. 저녁에 상순의 집에 가서 마이크 테스트를 도와주었다. 

 

4/12

새로운 숲으로 산책을.

상유씨가 선물해 준 구근이 활짝 꽃을 피웠다. 작약이 피었다.

현상 부부와 오랜만에 저녁을 먹고 술을 마셨다. 누군가를 응원하는 법에 대해 스스로 묻다.

 

4/13

토양검정을 맡길 흙을 채취했다. 수십 군데 이상 땅을 파고 속 흙만 조심스레 모아 고루 섞었다. 거짓말을 약간 보태서 새끼손가락만큼 큼지막한 지렁이들이 이 밭에 살고 있다. 농장의 땅은 이곳 저곳이 놀랄만큼 서로 다르다. 빛깔도, 향기도, 습기도, 다르다. 그러니 설령 똑같은 묘목을 심었다해도, 나무들의 생육도 과일맛도 절대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흙내는 아직 옅다. 수많은 것이 쌓이고 익어 향기로 변해가겠지. 그 향은 시간에 비례할 것이다. 마치, 사람과 사람의 마음처럼.

 

4/14

추운 날. 정원일을 했다. 손톱이 두 군데나 찢어져서 우울하다. 이럴 때면 하염없이 무력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병원에 들렀다가 추천받은 손톱 영양제를 사서 먹기로 했다. 얼마나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시내를 오며 가며 마빈 게이의 음악을 들었다. 

 

4/15

미세먼지가 최악인 날이다. 마스크를 꼼꼼히 쓰고 우비를 입고 고글을 꼈다. 올해의 첫 방제다. 봄순이 '움직일 때' 하는 방제인데, 새순에 낄 수 있는 진딧물과 슬슬 활동을 할 깍지 벌레를 막으려는 것이다. 동력 분무기 오일을 갈고, 그리스를 가득가득 채우고, 380v 두꺼비집 스위치를 올리고, 시동. 보르도액 2 포 + 기계유 10 L in 1000 L를 희석해서 꼼꼼히 분무해주다. 

 

4/16

사랑니를 빼고, 손톱을 붙이고, 회의를 하고, 잠시 쉬다가 방송을 하고 돌아오다. 

 

4/17

아직 벚꽃이 있는 곳에서 촬영을 하다. 차를 한 잔 마시며 기다리는데, 찻잔 속에 꽃잎 한 장이 톡, 내려온다.

 

4/18

비료 20 포대를 싣고 와서 뿌리다. 비료가 펠렛형으로 바뀌었다. 가루가 날리지 않으니 뿌리기 편한 것 같으면서도 빗물에 잘 녹아내릴까, 싶기도 하다. 더 천천히 녹아드는 것이 좋을 수도,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20 포대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는데 조금 모자라다. 한 두 포대만 딱 더 있으면 좋겠는데. 

관청에 들렀다가 농협에 들렀다. 농협에서는 뭐가 문제인지 비료 추가 구매가 어렵다며, 그냥 화학비료나 그런 거 뿌리시죠, 한다. 일을 모두 마치고 오랜만에 시내에 나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었다.

 

4/19

날이 좋아 마당에 누워 보현이와 일광욕을 했다. Diana Panton 의 음반이 왔다.

저녁이 되자 몸이 아파온다. 어, 왠 몸살이지.

 

4/20

몸이 아파서 늦잠을 자고, 골골대며 침대에 누워만 있다. 저녁에는 보현을 데리고 바닷가 식당에 갔다. 

inception studio에 메일을 보냈다. 

 

4/21

하루종일 집에서 앓다. inception studio에서 답장이 왔다. 몸살이 아닌, 이앓이였나.

바닷가 식당에 또 갔다. 그곳의 강아지와 보현이가 어쩌면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생겼다. 

 

4/22

소금 60킬로를 뿌리다. 파이프 렌치를 사와서 옛날 수도관을 헐어냈다. 점적호스 점검을 하고는 EM-B액를 50배 희석해서 1000 L 관주해 주었다.

 

4/23

비가 오는 날. 당밀과 키토 목초액을 사러 갔다. 생각도 못했는데, 선생님께서 현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놀라고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고 커피 한 잔을 권하는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선생님의 옷깃에는 빨간 동백 뱃지가 그대로 있었다. 꽃은 많이 왔는 지, 전정은 잘 마무리 했는 지, 선생님이 물으신다. 방제도 했고, 소금도 뿌렸다고 말씀드리자 흐뭇해 하신다. 꽃몽오리가 팥알만큼 맺혀도 일 주일은 넘게 지나야 꽃이 필거라고, 꽃이 만개하면 회색 곰팡이 방제를 꼭 해야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꽃잎이 늘어붙은 곳에 피는 곰팡이다. 80% 꽃이 피었을 때 한 번, 5일 후에 또 한 번 하라고 하셨잖아요, 라고 말하자, 웃으며 그냥 한 번만 해, 하신다. 나는 또, 귤굴나방 때문에 골치가 아픕니다, 라고 말했는데 선생님은 또 대수롭지 않게, 그냥 스케줄대로 시키는대로만 하면 일 없어, 라신다. 그러면 좋긴 하겠는데, 여리고 약한 레몬순에는 그놈의 나방들이 순식간의 날벼락이지 말입니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 남쪽의 마을을 돌아 보현이 밥거리를 사고, 나는 아내에게, 비오는 날 수영을 해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비를 맞으며 물 속에 있던 기억이 문득 차올랐다. 그런 기억이 분명 나에게 있는데, 언제였는 지 어느 곳인 지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바닷가였을까. 동네 풀장이었을까. 시골 우물가였을까.

 

4/24

이른 새벽. 보현을 다른 집에 맡기려면 오늘부터는 아침밥 시간을 늦춰야 한다. 출근하는 분들에게 보현의 아침 시간은 너무 이르다. 새벽 5시에 울리던 아침밥 알람을 조금씩 뒤로 늦추기로 했다.

문을 열고 애기 오줌을 뉘이는데, 비바람이 부는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한참을 보고 서있었다. 마당에 흩뿌려진 솔방울들이 비를 맞고 다시 오무라들었다. 우리 소나무가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너무나 고맙다.

 

4/25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과수원에 가려고 트럭에 탔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한참 실랑이 끝에 결국 보험회사에 전화를 했다. 견인차를 타고 공업사에 갔는데, 왜 그리 사고난 차는 많은 지 도대체 빈 자리가 없다. 부서진 차, 찌그러진 차, 꺾인 차. 터진 에어백하며 온갖 '환차'들이 모인 종합병원 같다. 정신 없이 이리저리 다니는 기사님들을 겨우 붙잡고 증상을 설명하고 한참을 기다렸다. 시트를 떼어내니 엔진이 흠뻑 젖어있다. 비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샌 걸까.

나는 차를 맡겨두고 터벅터벅 걸었다. 쉬엄쉬엄 걷다보니 낯선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다. 담 너머에서 익숙한 꽃 냄새가 불어왔다. 그리고 레몬꽃이 보였다. 분홍빛 레몬꽃과 노란 레몬이 함께 달려있는 그 비현실적인 모습과 향기에, 나는 한참을 서서 그 레몬 나무를 바라보았다.

관청에 가서 용도 변경 신청을 했다. 농협에 들렀다가, 오두막에 가서 음악을 듣다가, pink noise로 몇 가지 실험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 왔다.

저녁을 먹고 보현을 맡기러 시내에 갔다. 세 분이 우리를 맞아주셨는데 다들 친절하고 상냥해서 얼마나 고맙고 마음이 놓이는지 모른다.

 

4/26-4/30

가족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 농장에 가다. 

비에 불은 펠렛 비료가 너무나 잘 녹아가고 있다.

나무들에게도 인사. 팥알만큼 부푼 꽃망울들아, 잘들 있어라. 곧 돌아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