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과수원에는 아직도 겨울 삭풍이 맵게 부는데, 선생님이 계신 곳에는 벌써 매화가 피었네요. 이 섬에도 계절이 오는 순서가 있고, 그러니 한 발 한 발 차근차근 봄이 오고 있나봅니다.
선생님을 모시러 남쪽으로 갔다. 아침 9시에 뵙기로 했는데, 선생님은 미리 센터에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차를 타고 과수원으로 가는 내내, 우리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으면 선생님은 아무 말씀이 없다. 선생님처럼 이렇게 말수가 적은 어르신은 처음이구나.
작년에 흉년이라 어떻게 했어? 네... 뭐... 선생님은 내가 노래하는 사람이란 걸 아직 모르고 계신다.
선생님은,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 며 오두막에 올라가 앉으셨다. 그리고 종이를 꺼내, 그림을 그린다. 별 특별한 그림은 아니다. 그냥 삼각형 모양의, '나무' 그림. 선생님 표현을 빌자면, 우리가 '이발'해 놓은 나무들은 역삼각형 꼴이다. 이러면 안된다는 말씀과 함께, 나무의 주지 세 개. 그리고 그 주지에서 돋아난 '아들 가지'를 기준으로, 삼각형으로 해야한다. 그래야 빛이 나뭇잎에 잘 와닿으니까. 그리고 안은 비워라. 마른 가지는 잘라줘라. 그리고 실습이다.
여든 가까운 연세의 선생님은, 악력은 또 얼마나 센 지. 왠만한 가지는 전정가위로 뚝뚝 다 잘라낸다. 봄이 왔으되 봄이 아니라고 했나. 여전히 흐리고 추운 날. 생각지도 못했던 개인 전정 레슨을 받다보니 훌쩍 오전 시간이 지났다. 선생님, 식사하고 가셔야지요. 식사는 뭐... 집에서 하는 거지. 겸연쩍어 하시는 선생님을 모시고 근처 식당에서 돌솥밥에 김치찌개를 대접했다. 내가 차가 없어서... 미안하지만 좀 데려다 줘야 겠어. 그럼요 당연히 모셔다 드려야지요. 생협 얘기, 밭 농사 얘기, 인삼 농사 얘기. 간간히 오고 가는 이야기. 그러나 여전히, 묻지 않으면, 선생님은 말씀이 없다. 필요한 말이 아니면 말 수가 없는, 어딘가 수줍어 하시는 선생님.
3/2
다시 전정. 마음 급하게 먹지 말고, 하나하나 살피며 천천히 하기로 했다. 3월 한 달 내내 전정을 해야할 지도 모르지. 그런 마음으로 오전 일을 하고 저녁에 누나와 엄마를 만나 고기를 먹었다.
3/3
비가 온다는 예보다. 오전에는 운동을 하고, 오후에 일을 하다 돌아왔다. 프라이팬에 치즈를 구워 raclette을 해먹어 보았는데, 생각보다 나쁘지가 않네.
3/4
수선화 피다.
일을 하다가, 바흐의 Sonata를 들으며 쉬었다.
3/5
비가 추적추적 온다. 시내에 가서 밀린 은행 일을 보았다. 월요일이라 그런 지 사람들이 정말 많아서, 은행 두군데를 들르고 점심을 먹고 나니 금세 어머니를 모시러 갈 시간이 되었다. 장을 못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귀 한 마리를 사서 파에야를 만들어 드렸다.
3/6
어머니를 모시고 오두막에 가서 차를 한 잔 하고 돌아왔다. 물회를 사드리고, 공항에 모셔다 드렸다.
오는 길에 숙차 한 편을 샀다.
이파리를 떨군 앙상한 레몬나무. 꽃눈 하나에 맺힌, 어떤 희망 같은.
3/7
오전 밭일을 하고 나니 비가 온다. 전정은 1/3 정도 마친 셈일까. 운동을 하고 돌아왔다.
3/8
비가 날리고 몹시 추워져 오전에는 일을 하지 못했다. 오두막에 불을 지피고 위즈덤 분들을 기다렸다. 세 분과 차를 한 잔씩 하다보니 시간이 늦어져서, 파쇄기 픽업을 내일로 미루고 집으로 돌아왔다. 읍내에 갔다가 처음보는 식당에서 우연히 화정이를 만났다. 중국산 땅콩 한 봉지를 사서 돌아왔다.
3/9
첫 파쇄. 파쇄기를 빌리는 일은 말 그대로 전쟁이다. 사흘간 겨우 빌린 파쇄기로 작업 시작. 그런데 작년에 깔아둔 점적 호수를 다치지 않게 파쇄기를 옮기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삼나무 장작을 호스 앞 뒤로 받히고 조심조심 파쇄기를 옮기며 작업을 한다.
어느 팬에게서 받은 피더에 땅콩을 넣어 동백낭에 달아두었다. 온통 공사판이 되다시피한 이 소란스런 밭에, 예년처럼 새들이 와줄까.
3/10
싱어송라이터가 직접 시전하는 랩은, 클리쉐가 되지 않는다.
3/11
파쇄를 마무리하고, 기계를 반납했다. 퇴비간에 파쇄한 가지를 갖다두었다. 화정이가 장작을 부탁해서, 실하게 굵은 가지만 따로 손질해 담아두었다.
3/12
4/10부터 사흘간, 파쇄기 예약에 성공했다. 수강신청과 맞먹는 엄청난 경쟁률이다.
오전에는 마당의 풀을 뽑다가, 오두막에 가서 도시락을 먹고 일을 했다.
레몬 나무 아래에 파쇄목을 덮어주고 EM을 뿌려주었다.
천리향 나무 꽃을 따주었다.
수리할 오디오 인터페이스와 채널 스트립을 서울로 보냈다. 섬에 살다보니 일주일에 몇 번은 우체국에 들르게 된다.
관청에 들러 친환경 농가 직불금 신청을 했다. 친환경 지원 사업 결과는 아직 안 나온 모양이다.
3/13
트럭 와이퍼와 백밀러 수리를 하고 돌아오다. 이젠 비가 와도 걱정이 없네. 기계상사에 들러 농업 용수 볼밸브 수리를 부탁드렸다. 고장난 하드탑 문을 수리하고 세차를 했다.
보현이 귀청소를 해주었다. 마당의 풀을 뽑았다.
예쁜 멧비둘기 한 마리가 집으로 날아들어 소나무에 앉아 놀고 있다. 페이가 생각난다.
3/14
다시 전정.
특별히 수세가 약해진 나무 몇 그루를 돌보다. 빌레에 있는 나무 한 그루는 작년부터 상태가 점점 나빠져갔다. 재작년에는 이 나무에도 귤이 주렁주렁 달렸었지. 원체 작고 약한 나무라 아주 작은 귤이 열렸는데, 그러고 나니 작년 한 해 동안 나무의 상태는 더 급격히 나빠졌다. 말라죽은 가지를 쳐내고 손질을 해주니 그래도 왠지 한결 나아진 것 같은 기분. 또 다른 나무 한 그루는, 주지 하나가 완전히 고사했다. 그 크고 굵은 주지를 뎅강 잘라낸 마음을, 나도 어찌 표현할 길이 없구나. 하지만 살아야하지 않겠니. 어떻게든.
수세가 좋지 않은 나무와 레몬나무에 특별 처방으로 엽면시비를 했다. 아미노 액비 50mL + 키토 목초액 50mL + EM-B 100mL in 20L.
작년에 뿌린 유채 씨앗이 움을 티웠다.
배나무 전정을 해주었다. 오후에는 다올이와 성민이 밭으로 와서 승환이 앨범을 전해주고 갔다.
보현이가 이불에 지도를 그려서 이불 빨래를 했다.
운섭 형님께 승환이 앨범을 선물로 드렸는데, 갓 잡은 참돔 몇 마리를 선물로 주셨다. 벚꽃이 필 때, 桜鯛.
3/15
비오는 날. 트럭 와셔액 탱크를 수리하고, 아름다운 가게에 들렀다가 돌아왔다.
3/16
바람이 차다. 전정을 하다. 바닷가에서 제비를 보았다.
누나 부부가 보낸 선물과 카드가 도착했다.
3/17
이곳에 오기전까지, 지금 이 때가 이렇게 좋은 지 모르고 살았던 것만 같다.
영등할망이 온다는 계절. 이곳의 봄은 온통 노란색이다. 유채로, 복수초로, 절정으로 피어난 수선화로.
오전에 전정을 하고, 연장을 닦고 동백 기름을 발라놓고, 선휴씨가 오셨다는 연락을 받고 잠시 만났다.
3/18
생일날인 만큼 마당일만 조금 하고 하루 종일 쉬었다. 저녁에는 누나가 예약해준 뷔페 식당에 가서 아내와 생일 축하를 했다.
3/19
은주가 직접 만든 강정을 보내주었다. 봄비료를 받으러 농협에 연락을 했는데, 뭔가 오류가 있는 것 같다.
3/20
비. 오두막에 가서 녹음 장비 세팅을 했다. 진공관을 갈고, 새로 받은 인터페이스 세팅을 하고, 파워 케이블을 연결했다.
책을 읽으며 쉬다가 운동을 하고 돌아왔다.
3/21
몹시 쌀쌀한 춘분이다.
농협에 가서 비료 구입 내역서를 떼고 전정가위를 하나 더 샀다.
비료 신청에 뭐가 문제가 있던 건 지 보러 농협에 갔는데, 담당자가 없어서 허탕을 쳤다. 우체국에 들렀다가 커피를 한 잔 사 마시고 돌아왔다.
저탄소 농산물 인증 신청을 했다.
3/22
농협에 들러 비료 신청을 다시 하고, 전정을 했다.
오두막 계단 수리를 하러 핀을 뽑아 길이를 확인했다. 화정이네 들러 콤푸레샤를 빌려왔다. 작업장에서 키스 자렛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는데, 방금 전까지 우리가 밭에서 일을 하며 듣던 앨범이라 신기하고 반가웠다.
아내를 공동 농업 경영주로 등록했다.
3/23
타카건을 사서 계단 수리를 하고, 전정을 하고, 문경이를 만나서 녹다미에 가서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고 화정에게 콤푸레샤를 돌려주고 집으로 왔다.
3/24
대청소를 했다. 윤슬이네 가족이 집에 왔다. 두부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3/25
미세먼지가 최악인 날. 여기도 예외가 아니다. 레몬나무를 밭에 옮겨 심었다.
읍내 목욕탕 담가에 자목련이 피었다. 그림자까지도 곱다.
3/26
윤슬이네와 목장 구경을 하고, 밭 구경을 시켜주었다. 전정을 하고 집에 오니 친환경 지원 사업에 선정되었다는 통지서가 와 있다!
3/27
오랜만에 오일장에 갔다.
꽃을 사고, 윤성씨에게 보낼 동백기름을 사고, 12 킬로그램 짜리 아귀를 사고, 정말 오랜만에 채소 가게 할머니와 인사를 하고 고수와 돌미나리를 샀다. 기계상사에 들러 지원 사업 통지서를 드리고 돌아왔다. 사장님이 허리를 다치셨다는데 걱정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앵두꽃이, 왔다.
장에서 사온 꽃과 구근을 심고, 돈나무 가지를 쳐주었다.
3/28
오두막에서 상순이와 마이크 테스트를 했다.
상순을 보내고, 전정을 하고 레몬 나무에 EM을 관주해주었다. 나무가 말라가는데 걱정이다.
점심으로 청국장을 먹으러 갔는데, 식당에서 흘러 나오는 기타 소리가 너무나 좋다. 농협에 가서 100 미터 짜리 호스를 사고.
어느새 배나무에도 꽃몽오리가 맺혔다.
운섭형님과 형수님이 오셔서 차 한 잔을 하며 얘기를 나누다 돌아가셨다. 갓 짠 참기름 한 병을 주고 가셨다. 기계 상사 사장님과 통화를 했다.
3/29
여느날 아침처럼 포트에 차를 내리는데, 차포트를 보면서 정말 아끼는 것을 그려보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새벽 산책 길에 개복숭아 꽃 한 송이를 가져왔다. 그루터기만 남다시피한, 상처받은 나무에 핀 꽃이었다.
가지치기가 거의 끝나간다. 자투리 땅만 조금 남았다.
지영이네를 만났다. 벚꽃이 흐드러진 거리의 홍어집에서 유쾌하게 먹고 마시고 놀았다. 마사노부의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3/30
가지치기 끝.
마당에 튤립이 피었다.
3/31
치과 진료를 받고, 머리를 자르고, 비트 오피스 친구들을 만났다.
설령 이해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도,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이해해내고 싶다.
봄눈 말하길:
오늘도 조용히 놀러왔다가 "관리자 폴"의 자기소개글을 발견하고 빵 터졌어요 ㅠㅜb ㅋㅋㅋㅋㅋ늘 감사히 즐거이 다녀갑니다, 남은 4월 파이팅♡
2018년 4월 18일 — 11:16 오후
Grace 말하길:
4.3추념식 감사히 봤어요 :) 여기 남기신 일기도 그 어디에서 얻을 수 없는 위로가 됩니다
2018년 4월 18일 — 3:07 오후
skawl7056 말하길:
오랜만에 들어왔는데 건강하신거같아 기뻐요^_^**
2018년 4월 17일 — 2:10 오전
mkcafe 말하길:
작은 일상과 음악은제겐 가장 큰 위로입니다.봄비 축척이는 오늘같이 흐린 날 이 공간이 떠올라다시 찾아 왔습니다.^^
2018년 4월 14일 — 2:04 오후
falling 말하길:
왠지 삼월의 이야기에는 우리가 좋아하고, 듣고 있는 8집의 작고 큰 주인공들이
누군지 더 가깝게 알 것 같아요 :) 폴 님과 함께 그 곳에 있는..
땅콩을 먹은 어느 새가 삐삐~삐~삐~ 삐너츠의 노래 부르며 ㅋㅋ
노래하는 농부의 동백낭을 또 찾아오겠지요. ㅎㅎ
2018년 4월 14일 — 3:48 오전
페퍼민트 말하길:
누님의 편지가 마음에 닿네요. 폴님의 3월 소식은 그 어느 계절보다 행복해요. 그 마음 오롯이 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2018년 4월 12일 — 11:53 오전
상한 영혼 말하길:
폴님, 오랜만이에요.
친환경 지원 사업에 선정되신거 축하드려요^^
폴님 사진마다 보이는 모든 것들의 빛깔이 참으로 예뻐서 조금은 서글픈 봄입니다.
2018년 4월 9일 — 7:54 오후
닉네임 말하길:
저녁 8시30분이나 8시에 tv에서 들을 수 있어요. 그때마다 주방에서 거실로 눈썹 휘날리며 0.1초의 속도로 뛰어갑니다. 예쁜 진아양이 부르는 로고송도 너무나 좋지요. 금잔화를 보면 6집의 그 노래가 생각납니다.올해도 제비가 폴의 집에 이사 왔을까.혼자 생각 해 봅니다. 이발을 마친 귤나무들이 시원하고 따뜻해서 좋아할듯 해요. 이발 잘 하셨네요. 제 눈엔 삼각형이 100퍼 맞으며 골고루 햇빛이 스며들것 같고 바람도 잘 통할것 같습니다. 꽃이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게 건강하게 견딜 수 있을만큼 풍성하게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목련의 고운 그림자를 보는 뮤지션, 폴님 해적방송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018년 4월 9일 — 12:21 오전
camel 말하길:
폴님새삼스레 한번 불러봤습니다.복수초는 어찌 저리 찬란한지요.겨울 땅을 뚫고 고스라니 내어 놓은 노랑과 초록은 흠 잡을 데가 없네요.당당한 모습이 코끝이 시릿 할 만큼 대견해요. 고맙다. 봄의 꽃들아!지나버렸지만 생일 축하드려요. 건강하세요.그리고 이해해내시기를… 그래서 가벼워 지시길 바래요.고맙습니다. 음악과 건강한 뀰나무를 가꿔주셔서요^^
2018년 4월 8일 — 10:26 오후
mkcafe 말하길:
바흐의 곡이 참 좋네요지난 성남 공연때 뵈었었죠하루하루에 의미를 부여하기엔 시간은 덧없이지나가네요.빈듯 가득차있는..이란 말이 떠오르는건 폴님의 일상에서 그것이 느껴지기 때문이겠죠?어젠 바빠서 휴일아침에 보고 듣고 갑니다.편안하고 행복한 봄날아침에…
2018년 4월 8일 — 8:59 오전
spingirl 말하길:
안녕하세요? 폴! 4.3 추념식에서 애정하는 문프와 폴님을 동시에 보았어요. 그곳 제주의 분들에게 위로의 시간이었으리라 생각해요. 고맙습니다. 폴의 일기는 영문을 읽는 것처럼 모르는 단어들이 툭툭 튀어 나올때가 있어서 나중에 찾아봐야지하며 적기도하고 천천히 읽어가다가 오일장에서 동백기름을 샀다는 스위스개그를 발견해버렸네요. 주말 아침에 일기 올려주셔서 너무 감사하고요. 지난 시간들 이전 일기의 ‘어떻게 하면 생각이 멈추고 나는 더 멍청해질까?’를 품고 살던 시간을 뒤로하고 이젠 이 일기의 마지막 세줄 이해에 대한 소망을 담고 이봄을 견딜게요. 글, 노래, 존재 에 모두 감사해요.
2018년 4월 7일 — 10:32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