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4
비료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관청에 다녀왔다. 미루고 미루던 편지 정리를 하였다.
10/15
트럭 정기 검사의 결과, 매연의 몇몇 성분이 기준치를 초과하였고, 당연하게도 불합격이다. 뒷 바퀴 타이어도 교체하는 게 좋겠다는 진단도 받았다.
10/16
아직도 어두운 아침 6시.
단순한 아름다움이란 정말 복잡한 길 끝에만 있는 건 지 아니면 그저 어려운 길을 괜히 가는 게 아니라고 믿고 싶은 것 뿐일까.
Pina를 보다.
10/17
물이 높이 들어찬 날. 숲을 다녀오다. 인터넷으로 대충 찾은 공업사에 트럭을 맡기고 돌아오다. 오랜만에 사케를 마셨다.
10/18
농협에서 비료를 찾고, (한 포대는 집으로 가져와 뿌리기로 마음을 먹고) 14 포대를 밭에 뿌렸다. 공업사에서는 트럭 수리가 힘들다고 말해주었다. 자동차 검사를 너무 에프엠대로 받은 게 아니냐고 한 말씀 하시고는, 불법 내지는 편법의 소지가 다분한 (!) 제안 하나를 하셨는데, 그냥 다른 곳으로 가봐야할 것 같다.
Fred Hersch의 피아노를 사랑하는 나지만, 그가 연주하는 브라질 곡-정확하게는 조빔의 곡-은, 별로다. 피아니스트로서 정말 큰 산과 같은 음악가이지만 '노래의 에센스'에 대한 감각은, 또 다른 얘기 같다.
보현이의 등에서 마지막 딱지가 떨어졌다. 축하해, 아가. 고생많았다.
10/19
복통으로 잠을 설친 밤. 처음 겪는 일이다.
10/20
오롯이 시가 된 숲길을 걸었다. 나는 '시적인 것'에 앞서는 '시'는 없는 거다, 생각했다.
까마귀 무덤 위에 놓아준 수크령이 곱게 말라가고 있었다.
토론토에서 필름 작업을 하는 세바스티앙과 메일을 주고 받다.
남근 형님께 부탁을 드려 공업사 한 곳을 소개 받았다. 비가 흩뿌리는 날, 온갖 이유로 망가진 차들이 빼곡한 공업사에 트럭을 맡기고 돌아왔다.
10/21-10/24
GMF 연습과 공연.
10/25
비. 어린이 합창단 지휘자 한 분을 만나고 돌아왔다.
손석희 검찰총장이 진행하는 뉴스룸을 시청했다.
10/26
비. 올 가을 들어 처음 맡은 화목난로 냄새.
10/27
아무도 올 것 같지 않은 외진 숲 길 가에 어여쁜 꽃다발 하나가 놓여있었다. 누군가에게 준 흔적 같기도, 누군가를 보낸 흔적 같기도 하다.
해가 쨍하고 꽃이 드문 가을 과수원인데 왠일인지 꿀벌들이 분주하다. 별꽃아재비와 쑥부쟁이가 군데군데 피고 초생재배를 한 양 노랗게 시든 풀이 바닥에 누워버렸다.
이렇게 눈이 부셔도 일을 할 땐 선글라스를 낄 수가 없는데, 미묘한 나뭇잎의 변화를 알아챌 수가 없기 때문이다.
10/28
집앞 바닷가에 백할미새와 흑로들이 조록조록 비를 맞으며 먹이를 찾아다닌다. 헌데 올 가을에는 왜이리 비가 잦은 걸까.
10/29
이토록 키가 큰 삼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면 오래된 나무문 여는 소리 두툼한 거품이 터지는 듯한 그런 소리가 나무 꼭지에서 들려온다.
10/30
나오미 폴록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내복을 꺼내 입었다. 볼레로를 썼다.
10/31
비. 세바스티앙이 보낸 필름이 무사히 도착했다.
창고 건축 허가를 받았다. 지영아빠 봉식아빠와 점심을 먹었다. 털모자를 꺼내 썼다.
후쿠다 시게오의 책을 읽다 잠이 들었다.
(...)하야시 요시오는 동화 이외에는, 다른 사람이나 번거로운 잡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하나의 일을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묵묵히 걸어온 사람의 자신감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 일체 신경 쓰지 않고 오늘도 아침부터 등허리를 꼿꼿히 펴고 그림책 그리기에 집중하고 있다.
벌써 7-8년 전부터 ‘구운 동화’라는 이름의 도자기 인형을 만들어 동화책과 함께 발표해 왔다. ‘구운 동화’는 평면 제작 활동에 깊이를 더한다고 생각한다. 그림 액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또 하나의 하야시 요시오의 동화 사랑이 액자를 벗어나 자립했다는 느낌이다.(...)
-후쿠다 시게오 <디자인 재유기>
새로울수록 외로운 게, 길이다.
보현이는 내가 침대에서 잠들기 전까지 침대로 가지 않는다. 내가 침대에 누우면 비로소 자기 침대로 가서 잠을 청한다.
11/1
광합성 세균 5L + 아미노 액비 1.5 L + EM-B 5 L + 천일염 2.5 kg + 키토 목초액 5 L in 1000 L.
맑고 추운 날. 계속된 비로 미뤄진 마지막 방제를 시작했지만 거센 바람과 추위에 집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꽤 익은 감귤 하나를 따와 당도를 쟀다. 9.9 brix다. 한 달 후면 당도는 더 올라갈 것이다.
실은, 달지 않아도 상관없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그렇게 살아낸 나무가 키워준 귤이면, 되었다.
무비 카메라 촬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다.
11/2
어제보다 풀린 날. 남아있는 액비를 마저 분무했다. 그리고, 올해의 농삿일이 끝났다.
알지도 못하는 접목을 하느라 부산했던 봄. 유난히 가물었던 여름. 공연 준비에 귤굴나방 방제를 놓치고 만 초가을. 계속 애를 먹이던 기계들. 어린 레몬 순을 무참히 뽑아버렸던 태풍 차바.
나는 나무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고 나무들은 나를 향해 이파리를 흔들어 주었다.
11/3
과수원에 가서 뒷정리를 하고, 리사무소에 가서 내년도 유기질 비료를 신청했다. 내 밭이 없던 작년에는 내년 치 비료를 주문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부러웠던지.
지영이네를 만나서 다시 창고 얘기를 나누었다.
승준이의 앨범이 집에 왔다. 승준아, 새 노래가 좋구나.
11/4
어머니가 오신 날. 마당의 나무와 풀과 꽃에 비료를 주었다.
11/5
프레드 허쉬의 공연. 나는 일부러 이층 맨 뒷 자리를 골랐다. 내가 이층에 올라와있는 게 아니라, 프레드가 땅 아래로 꺼져있는 기분이 든다. 10 여분에 달하는 임프로바이즈로 공연이 시작되고 이어서 조빔의 retrato em branco e preto. 조빔의 곡을 굳이 연주해야 하는 거였다면, 그나마 잘 골랐다 싶다. 스탠더드 곡들과 songs without words 앨범에 있는 곡 하나를 연주했고 앵콜로는 뭔가 급한 템포의 valentine. 한 시간 20 여분의 짧다면 짧은 공연이었다.
그리고, 거리로 나갔다.
11/6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다. 동희와 점심을 먹었다.
11/7
상수도 설치 고지서를 받다. 어머니를 모시고 과수원에 갔다. 갈색빛 방아깨비가 풀 사이를 뛰어다녔다. 망초와 쑥부쟁이가 한데 섞여 피어났다.
11/8
비. 상수도 설치 비용을 납부하고, 지영이네를 만나서 자세한 사항을 점검했다. 아쉽지만 태양광과 다락을 설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목요일에 비가 온다고 하여, 공사 시작일을 하루 미루기로 했다.
2년 전 오늘, 나는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다.
11/9
어머니와 병원에 들렀다가, 공항에 모셔다 드리고 변호사 분들을 만나 점심을 먹고 숲 산책을 하다가 상순이네 부부와 저녁을 먹었다. 탄이를 필두로, 정말 많은 강아지들을 만난 하루. 상순에게서 책 한 권을 빌려왔다.
당분간 뉴스나 포탈을 보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11/10
비. 세바스티앙에게 필름을 보냈다. 오랜만에 운동을 하고 돌아왔다.
닉네임 말하길:
아름다워요. 꼭 언젠가 들어볼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6년 12월 27일 — 5:30 오후
닉네임 말하길:
벼르고 벼르다가 Lucid Fall#8 볼레로를 들어보았습니다. 처음 들었던 만생 양파밭의 피아노곡이 아프게 생각났습니다.
2016년 12월 27일 — 5:15 오후
whitesky0908 말하길:
보고 싶어요 폴님 !
2016년 11월 25일 — 9:39 오전
나무 말하길:
폴님이 직접 키우신 귤나무에서 열린 귤들은 어떤 색과 맛일지 궁금하네요. ^^
추운 겨울날 누군가의 손에 닿아, 작지만 고마운 위안이 되어 주겠죠.
저한테도 기나긴 겨울을 조금은 달게 해주는 '소울프룻' 이거든요.
일단 먹기도 편해서 더 좋아합니다. ^^;
그러고 보니 겨울과 귤은 어감상으로도 닮아 있네요.
영화 <연애사진> 생각도 나네요. 거기서 귤이 좀 인상적인 소품으로 나와서요.
2016년 11월 13일 — 11:46 오후
눈의여왕 말하길:
마음이 힘들때마다 조용히 들어와 위로 받고 가곤 해요.폴님의 사진과 글을 보면 괴롭고 강팍하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 지고 차분해 진답니다. 항상 감사해요.몸이 아프면 마음도 따라가기 마련인거 같아요.건강하시길…오늘은 용기내어 몇자 남겨 봅니다.^^
2016년 11월 11일 — 11:04 오후
눈꽃 말하길:
온갖 종류의 동물들이 가득한 곳에서폴님이 꿈에보여 오랜만에 와보니 여전히 잘 계시는듯하네요 아프시지 마시길. . 어지러운 세상 저또한 죄인 같아 늘 마음이 무겁습니다. 글속 손석희 검찰총장 ㅠㅠ 깊은 공감이. .
2016년 11월 11일 — 12:24 오후
닉네임 말하길:
드디어 건축허가를 받으셨군요!진심으로 축하합니다!그곳에서 만드실 「길」을 응원 합니다.
2016년 11월 11일 — 9:04 오전
ehhong0 말하길:
당분간 뉴스나 포탈을 보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이말이 너무 와닿네요 무엇이 정의일까요? 무엇을 믿고 살아야하나요?나는 분명열심히 살고있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닌가봅니다. 세상은 더 미쳐돌아가는것같습니다.나만의 고민에 빠져 소소한 위로를 받고 안도할수 있었던 때가 그립습니다.나혼자 열심히산다고 되는 세상은아닌가봅니다
2016년 11월 11일 — 12:50 오전
ibja 말하길:
오랜만에 폴님 소식 글 사진들 보며 '아름답다' 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괜시리 눈물도 좀 나구요 많이 춥지 않은 11월 보내시길
2016년 11월 10일 — 11:22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