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1
집으로.
8/22
지구 상회의 새 보금 자리는 작고 아늑했다. 바람이 잘 들고 햇살도 잘 든다. 창문 너머 풍경이 있어 좋다. 방수가 되지 않은 시멘트 옥상을 보니, 처음 섬에 온 날이 생각났다. 우리집 옥상도 그랬지. 금귤에이드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동원씨가 전해줄게 있다며 왔다. 새로 낸 사진집이 엘피를 닮아서 깜짝 놀랐다. 냉큼 사인을 받아왔다.
8/23
오두막에 방역을 하러 세 분이 오셨다. 반 나절이 조금 지났을까.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 되었다. 4 년 가까이 창문에 붙어있던 스티커들, 태풍에 붙여놓은 테잎 자국, 온갖 먼지며 벌레들의 잔해가 말끔히 치워졌다.
8/24
아침 햇살이 아름답다.
멧비둘기 부부가 서로를 부르다 교대를 했다. 둥지에 앉아있는 한 마리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다른 파트너가 둥지로 올라오고 새끼들을 품는다. 멧비둘기 부부는 모든 노동을 나눈다.
8/25
물부엌 청소를 했다.
태풍 예보가 있다.
최종 디자인을 네덜란드로 보냈다.
8/26
태풍 바비가 집 앞 바다를 지나 육지로 올라갔다. 밤이 아닌 낮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소나무가 휘청대고 둥지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부모 비둘기는 필사적으로 둥지를 지키려 애썼다. 바람은 점점 더 거세지고, 새끼들 곁에 있는 것이 오히려 위험하겠다 느꼈는지, 이내 나무를 떠났다. 비를 뚫고 옥상에 올라가 보니, 손바닥보다 작은 아기새 두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8/27
밭도, 집도, 큰 사고 없이 태풍이 물러갔다.
우린 두 번의 태풍을 이겨낸 아이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몸집이 큰 아이는 바비, 작은 아이는 장미.
8/28
문호, 제익을 무주에서 만나다.
8/29
무주에서의 둘째 날.
대학 친구들을 만나며 문득 알았다. 나는 나를 몰랐고, 그래서 공과대학을 갔다는 걸.
8/30
'무슨 음악'을 듣고 있는가, 보다 '무엇'을 듣고 있는가가 더 중요한 지도 모르겠다.
집으로 와서, 나일론 기타 줄을 갈았다.
8/31
올해 첫 관주를 하다. 총 4000 리터.
2020년에 만든 EM-B 한 말에 더하기 2019년 만든 EM-B 한 말과 남은 아미노액비를 네 번 나누어 관주해 주었다. 관이 새는 곳이 있는데, 어쩔 수 없다. 겨울에 하나하나 손을 보는 수 밖에.
태풍이 또 온다고 한다. 창고 정리를 하고 태풍 단속을 했다.
경영난으로 인해 단골 우체국이 우편 취급국으로 바뀐다는 공고를 보았다.
9/1
방역업체에서 카페트를 가져다 주셨다.
바람이 점점 심해진다. 마당에도 액비를 관주해주었다. 초피나무 사이로 호랑 나비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담쟁이와 앵두 나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바람이 거세질수록 나비는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리고, 떠났다.
9/2
태풍 마이삭.
해가 지자 미친 듯이 비바람이 불었다.
버티고 버티던 장미가 떨어져 버렸다.
차갑게 식은 장미를 안고 많이 울었다.
밤새 옥상에 올라가 바비를 살피다 잠이 들었다.
9/3
앵두 나무의 주지가 부러졌다. 가지를 잘라내고 톱신 페스트를 발랐다. 널부러진 쓰레기들을 치웠다.
과수원의 쑥대낭이 쓰러져 귤 나무를 덮쳤다. 나무를 전기톱으로 잘라냈다. 다행히 귤나무가 다치지 않았다. 오두막 문틈으로 물이 샌 것 같다. 문이 물을 잔뜩 먹은 것도 같다.
바비는 대견하게 태풍을 견뎌냈다. 아직 어미새가 오지 않는다. 어서 오면 좋겠는데.
이름을 잘못 붙여준 걸까. 나는 하루 종일 나를 원망했다.
9/4
가스 점검 차 기사님이 오시다. 바비의 엄마가 옥상에 앉아 우리를 물끄러미 내려보았다.
새와 나눌 수 있는 게 음악 밖에 없는 것 같다.
바비에게 모차르트의 피아노 곡을 틀어주었다.
많은 이들과 안부를 주고 받았다. 병원가서 약 타고 선생님들께 책 선물을 했다. 유기농자재 지원사업 서류를 만들었다. 가을 비료를 주문했다, 추석 전에는 보내주시겠다고 한다.
9/5
또 태풍 소식이다.
오두막 문틈을 이중으로 막고, 분무기도 창고에 넣고 단속을 하고 돌아왔다.
9/6
태풍 하이선.
마이삭보다는 심하지 않다. 아직 방심할 수는 없지만.
9/7
태풍이 무사히 지나갔다.
바비가 무사하다. 이제 아무 걱정이 없다.
집시기타 줄을 갈았다.
9/8
가을방제 3-1: EM-B 5L + 아미노 2L + 키토목초 5L + 소금 1kg + 유기칼슘 1.5L.
기술센터에 광합성 세균을 알아보았다. 매년 규정이 바뀌는데, 올해엔 한 번에 30 리터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다만, 규칙적으로 받을 수가 없다는 것도, 30 리터를 받아도 냉장 보관할 곳이 없다는 것도 함정이다.
풋귤 따다.
뱃불 색깔이 더 짙게 변했다. 가을인가.
9/9
가을방제 3-2: 레시피는 어제와 같다. 날이 어제보다 덥다.
새로 산 아미노 액비 냄새가 별로 좋지 않다. 4 리터를 덜어서 EM-B 4리터와 섞어두었다.
방제 중에 지영 아버지와 성현씨가 와서 오두막을 둘러보았다. 내일 보수 공사를 하기로 했다.
바비가 소나무를 떠나 마당 곳곳을 다닌다.
저녁 산책길에 물총새 한 쌍과 물뱀을 보았다.
9/10
성현씨와 재광씨가 왔다. 오두막 보수 첫 날.
몰딩을 다 떼어내고 일층 천정 osb 합판을 잘라냈다. 전부 갈지는 않고 많이 썩은 부분만 교체하기로 했다. 그리고 안쪽으로 몰딩을 다시 붙였다. 쪽지붕에 놓인 에어컨 실외기를 떼어내고 너와를 모두 걷었다. 빗물 받이를 달았다.
집에 돌아오니 유기농 인증서가 와있다.
7 년 만에 유기농 농가가 되었다.
9/11
보수 이튿날. 쪽지붕의 방수시트 한 번 더 깔고 아스팔트 슁글을 올렸다.
꽤 큰 쌍살벌 집을 발견했다. 벌은 날개만 타면 끝이에요. 1 초도 안되는 시간, 노련한 119 대원이 토치로 벌집을 태우고 금세 돌아가셨다.
한두 시간이 지나고, 팔뚝을 찌르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쌍살벌 한 마리가 멀리 날아가는 것이 보인다. 복수를 했구나. 그래. 이 정도라면 기꺼이 감수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하며 보건소로 갔다.
9/12
아침 일찍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았다. 신기하게도 선생님이 나를 기억하신다. 어 저번에도 벌에 쏘이셨잖아요. 손등에.
바비가 집에 올 때를 기다렸다가 장미를 묻어주었다.
바비는 소나무에서 물끄러미 우리를 내려다 보았다.
9/13
하루 종일 바비는 소나무를 떠나지 않았다.
mkcafe 말하길:
마음이 복잡하면 시력이 떨어지던가요?
금번 소식을 반갑게 들춰보다 우연히 껑충 뛰어 이소식에들어오게 됩니다.
나 살겠다고 화초가 말라있길래
어젠 시원스레 물을 주었습니다.
지금 그 화초가 된 기분입니다.
반갑습니다 늘..
2020년 11월 22일 — 4:36 오후
homegirl 말하길:
유기농 농가 인증 너무나 축하드려요~ 참 자랑스럽네요 놀면뭐하니에서 재형님이 루시드폴 귤 딸때 됐다고 했을때 괜시리 반가웠어요. :)
2020년 11월 20일 — 12:57 오전
눈꽃 말하길:
moment in lvoe음악 너무 좋네요 역시 폴님!! 폴님 팬이라면 어떻게 음악 만드시는지 알아야할텐데 전 이해력이 딸려서 ㅠㅠ 아,이제서야 왜 안테나 랩이라고 부르는지 알겠어요 ^^ㅎ자세히 써놓으신 과정을 보니.완전 실험실 ㅋㅋ센서붙이실 생각은 대체 어떻게하신걸까요 … 나무는 대체 어떻게 전기가 흐르구요;;;…전자의 흐름을 포착하셨다면…주변 다양한 것들 전기적인 것들의 영향일까요 푸른 잎에서 빛의 영향을 받으면 전자전달계도 가능하니..전자들이 순차적으로 내리막길을 가며 팡팡~~ 음악 들으며 미시 세계를 상상해보니 마치 제가 괴짜 과학자가 된 느낌입니당 ㅋㅋㅋ
2020년 9월 25일 — 3:01 오후
봄눈 말하길:
엘피 디자인 정말 예뻐요!! 유기농 농가 축하드려요~ 와아!!
바비는 장미몫까지 힘내어 잘 날테고, 폴님은 유기농 농부가 되어 바다 음악을 지으려고 공과대학을 가셨었나 봅니다..ㅎㅎ
태풍 비바람을 견디고 난 제주에 더 따스한 가을 햇살이 찾아들길~
2020년 9월 22일 — 3:25 오후
닉네임 말하길:
전 정말 폴 노래와 기타소리만 들을 수 있다면 어디든 언제든 갈 수 있어요.달나라나 알래스카도 갈 거예요..
갑자기 생각만으로도 입가에 웃음이 돕니다.
2020년 9월 20일 — 1:24 오후
닉네임 말하길:
와!!!!!!드디어 유기농 인증! 너무 기쁘네요! 축하해요!
2020년 9월 19일 — 9:10 오전
kidseye 말하길:
돌로 무언가를 묻어주었구나를 사진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는데, 태풍에 죽음이 있었군요. 새라는 존재는 새장안에 가두어 둘수도 없고 둥지생활을 하는 어린 새라 마땅히 피하지도 못했군요. 장미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기억되기를요. 자책할 이유도 필요도 없어요. 폴님 덕분에 자연 재해 앞에, 아마 많은 나무들에서 둥지를 틀고 어미새를 기다리다 힘없이 떨어졌을 다른 장미들에게도 r.i.p.
마지막 음악 참 아름다워요.
LP 엔 무슨 음악이 담겼을까. 기대합니다 :)
2020년 9월 15일 — 8:25 오전
gilhyung 말하길:
폴님 태풍 피해는 괜찮으신지요.. 장미 일은 유감입니다
벌에 또 쏘이셨군요.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선명한 가을이 훌쩍 다가왔어요. 멈춘 것 같은 세상이지만 문턱을 넘는 계절처럼 우리도 더 강해지고 깊어지길 바랍니다. 그것이 세월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요.
소식 전해주셔서 감사하고, ‘손편지’ 또한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을게요.
2020년 9월 14일 — 9:40 오후
mong 말하길:
태풍에 피해가 적기를 마음으로 빌었는데,
그렇지가 않았네요.
장미는 좋은 곳으로 갔겠죠?
제가 일했던 전 직장이 욕실 자재를 도소매하던 회사라 ‘라보’를 참 자주 봤었는데요.
라보가 저렇게나 예쁜 아이인 줄 오늘 처음 알았네요.
삭막한 도시에서의 ‘라보’도 제주에 내려온다면
폴님의 라보처럼 저렇게나 맑고 푸르게 보이려나요.
+
‘유기농’ 뮤지션에, ‘유기농’ 농부까지 되신 폴님, 축하 드립니다!
2020년 9월 14일 — 4:43 오후
mong 말하길:
폴님의 섬 제주의 한 숙소에서 제 댓글을 다시 봅니다.
비행기 시간이 빠듯하네요.
다음 번엔 친구랑, 엄마랑 같이 올 거예요.
아, 물고기님들,
[ D&DEPARTMENT JEJU by ARAIRIO ]
여기 진짜 너무 좋아요.
제주 오실 일 있으시면 꼭 와보세요.
D&DEPARTMENT JEJU
제주 제주시 탑동로2길 3
http://naver.me/FUwWMYyh
회원제이고요.
제가 어제 체크인하면서 아주 레어한 소식을 들었는데
일단은 저만 알고 있겠습니다.
아직 확정이 아니라고 하셔서요.
폴님, 물고기님들~
좋은 하루 보내세요 ^ ^
2020년 9월 19일 — 11:25 오전
닉네임 말하길:
머요머요!!!!!! 아….레어한 소식이 제가 바라는 그런 소식이길 기도 합니다. 힘든 일상에 한줄기 빛 추운 잠자리에 따뜻한 수면양말과 수면바지같은 소식이길….
2020년 9월 20일 — 1:10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