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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연습. 셋리스트를 정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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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둥지 아래 떨어져 있는 제비알을 보았다. 하나, 둘, 셋. 세 개. 옆집 할머니께서 완두를 콩대 째 꺾어 한 아름 가져다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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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나무에 잔뜩 낀 깍지벌레와 진딧물이 사라졌다. 형철님이 다니카와 슌타로의 시집 사과에 대한 고집을 선물해주었다. 바다에 돌을 주우러 갔다. 뻘을 딛자 불티처럼 깅이들이 흩어졌다. 정원 둘레에 한 줄 돌담을 쌓으니 아담한 화단 하나가 생겼다. 그런 화단에 앵두가 익고 송엽국 별이 하나둘 뜨고 지고 사상자를 닮은 방풍 꽃이 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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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

거센 삭풍 불던 그 겨울날 처음 집을 본 어머니는 단박에 앵두나무부터 알아보았습니다 엄마의 할머니는 많은 손주들 중 유독 엄마를 사랑하셨다고 엄마는 늘 말했습니다 말수도 별로 없으셨다는 엄마가 오는 날이면 빨갛게 익은 앵두를 한웅큼 따서 멀리 동구밖까지 나와 다른 손주들 볼까봐 내 엄마에게만 몰래 쥐어주셨다는 나의 할머니의 엄마말이에요 나도 할머니가 있었지요 몇 시간의 여정 끝에 어둑한 바닷가 집에 닿던 겨울밤 할머니는 엄마에게 앵두주 한 방울만 먹어보라며 항상 검붉은 앵두주를 권하시고는 그릇에 남은 쭈글쭈글한 앵두알을 후루룩 입에 넣으셨는데 나는 그런 나의 엄마의 엄마를 볼 때마다 유독 나의 엄마만 더 젊어보여서 어딘가 미안하게 무언가 안도했던 것 같아요 엄마는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잘은 몰라도 그건 아주 멀고 멀리 있는 것이야 하고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작년 봄 앵두꽃은 만발했지만 이내 시들어 버렸습니다 파랗던 이파리 끝이 바삭바삭 타들어가더니 앵두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나무는 몰라도 나는 앵두 나무 만큼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의 할머니가 엄마에게 따주던 그 앵두가 다시 열리면 좋겠다 간절히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봄이 오고 나비 날개 같은 앵두꽃이 한창일 무렵 많이 많이 앵두가 열리게 해달라고 왱왱대는 벌들을 물끄러미 보며 빌었던 것 가지를 쳐주고 웃거름을 주고 영양제를 뿌리고 이리저리 손을 쓴 덕분만은 아니겠지만 드디어 올해에는 예쁘고 빨간 엉덩이의 앵두가 꽤 많이 열렸습니다 늦게 따면 혹시라도 곰삭아버릴까 이건 어쩌면 우리 엄마의 할머니가, 그러니까 우리 엄마의 엄마의 엄마가, 우리 할머니의 엄마가 보내준 선물일 거야 생각하며, 나는 오늘 아침 일찍 우리 엄마에게 앵두를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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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원되다시피한 과수원 한 곳을 보고 왔다. 봉식이네에 기타를 맡기고 돌아왔다. 제비 새끼 우는 소리가 벌써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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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윤우의 음반을 들었다. 음반을 듣는다는 건, 시디가 멈추는 소리를, 그 끝에 엮인 침묵을, 비로소 들리는 새소리를, 수도관 물 흘러가는 소리를, 경운기 소리를, 뱃고동을, 옆집 개 짓는 소리를, 엔딩 크레딧이 되는 그 모든 것을, 듣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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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나무 꽃으로, 찔레꽃으로, 숲이 환하다.

슌타로의 연보를 보니 1952년 부터 2015년까지 시작詩作에 공백이 거의 없다. 카에타누 벨로주의 디스코그라피도 그렇다. 나는 어쩌면 이것이 가장 시인답고 가장 뮤지션다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믿음의 수식어로는 '깊은' 그리고 '오랜' 이 가장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기타 줄을 갈았다. 악보를 정리해서 윤성씨에게 보내고 통화를 했다. 기타 연습. 시즌 오프가 되어야 투수들이 투구폼을 바꾼다지. 난 언제 기타치는 폼을 바꿔야할까. 젠장, 올 시즌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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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나는 마당에 서 있다.

잔디 위에 이슬이 내렸다.

이웃집 대지 끝에 있는 큰 아카시아나무 뒤쪽에서 해가 뜬다.

그때 내 마음에 지금까지 없었던 무엇인가가 생겨난다.

좋아한다, 싫어한다. 기분이 좋다, 나쁘다. 기쁘다, 슬프다. 무섭다, 무섭지 않다. - 여태껏 겪어온 그러한 심리 상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 더 큰 것, 그때는 그 이름을 몰랐지만 아마 '시'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그날의 감동을 나는 초등학교 다니는 소년답게 간단한 일기로 적는다.

"오늘, 난생처음 아침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 다니카와 슌타로 ,『사과에 대한 고집』(요시카와 나기 역, 비채)

슌타로의 시집을 읽다. 팬이라면서. 신간이 나온것도 몰랐나. 팬이라면서.

나는 누구의 팬이었더라. 그 '누구'들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살아왔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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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순의 집으로 올라가는 풀섶에 애기도라지꽃이 피어있었다. 봉식이네가 선물해 준 아이들 간식을 나누어 주었다. 상순은 Chopin Project CD와 집의 암탉이 나은 유정란 몇 개를 주었다. 보리 수확을 끝내고 그루갈이를 시작하는 밭이 이제 하나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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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보르도액과 기계유유제를 사러갔다. 농약방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지금 보르도액을 뿌리면 절대 안 된다고 한 말씀씩 하셨다. 400 리터씩 양쪽 필지에100 배 희석, 총 800 리터를 엽면 시비했다. 일이 끝날 무렵, 이 밭을 사셨다는 분이 오셔서, 보르도액은 좀 더 일찍 해야지, 또 한 말씀하신다. 맨스플레인에 필적할, 파머스플레인 (Farmersplain)이란 단어는 혹시 웹스터에 없나요. 암튼 생각보다 일도 늦어지고, 집에 오자마자 후다닥 씻기만 한 채 나는 곧장 연습 장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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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거리를 지나 후미진 샛길로 들어서니 길 한 편으로 훤칠한 동백나무 숲이 보였다. 온통 나무고 숲이고 과수원인데, 어디가 연습장소인지 알 수가 없다. 네비게이션으로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다가 윤성씨를 만났는데 차를 돌리는 윤성씨가 찜질방 건물을 가리킨다. 저기라고. 에이 설마. 그런데 이미 문을 닫은 지 꽤 된 것 같은 건물 앞에서 안경을 쓴 어떤 분이 인사를 건넨다. 그러고보니 윤성씨 공연 때에 뵌 적이 있는 분이다. 얼떨떨한 채 그 넙데데한 건물에 들어서니, 말 그대로 피아노의 천국이다. 크리스탈 피아노에 100 년도 더 된 스타인웨이 피아노도 있고, 한 쪽 켠에는 업라이트 피아노들이 가득하다. 선생님은 우리를 위해 피아노 한 대를 마련해 두었다며 안내를 해주셨다. 그렇게 연습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밖은 어두워지고 동네 주민 몇몇 분이 리허설을 지켜보며 음악을 들으며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높은 삼나무에 폭 싸인 듯한 작은 감색 하늘에 별들이 뿌옇다. 찬 별이 내쉰 듯 사늘하게 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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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 새끼들이 엄마를 찾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봉식이네에 들러 기타를 찾았다. 네 식구가 직접 짓고 계신 옆 집은 벌써 외장 공사가 끝난 듯 보였다. 목수 가족들과 차를 한 잔 하면서 집을 짓는다는 것, 에 대한 얘기를 듣다 부랴부랴 리허설 장소로 갔다. 카페에 가까워지자 윤성씨의 피아노 소리도 가까워지고, 한산한 돌집 카페에서 커피와 케잌을 먹으며 연습을 하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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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ID FALL plays Quiet and Comfort / 목소리와 기타 2015 May 29-31

 

Set List

나의 하류를 지나 (5/29) / 오, 사랑 (5/30-31)

종이새 (unreleased)

Florence, Florence (unreleased, 5/30-31)

검은 개

꿈꾸는 나무

오, 사랑 (5/29)

길 위

봄눈

천사의 노래 (unreleased)

여기서 그대를 부르네

레미제라블

푸른 연꽃 (unreleased)

¿Séras Verdad? (por Quique Sinesi)

그대는 나즈막히

연두

어부가

(Encore) 

고등어

여름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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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뒤에서 무던히 애써주신 스탭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사흘 간 저와 함께 높이 높이 날아준 윤성씨, 감사합니다.

불편한 점 많았을 터인데 이해해주신 물고기님들, 멀리 지방에서 혹은 해외에서 오신 분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사흘 동안 저와 함께 걸어주신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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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북촌에 가니 섬에는 없는 노란 고들빼기와 애기똥풀이 제일 먼저 인사를 해주고 내가 살던 집 마당 전나무는 이미 베어버렸는지 파릇한 능소화 덩굴만 빈 허공을 오르고 있고 명자나무는 좀 더 건강해진 것 같아 다행이었어 매일 밥을 챙겨주던 고양이들도 그대로고 그 사이 또 새끼들을 낳았겠지 호두나무에는, 태어난 지 한 달이 조금 넘은 우리 조카의 주먹만한 호두가 벌써 주렁주렁 열려있었는데 부러진 가지에 언젠가 마음 아파했던 기억에 그 가지가 어디었을까 나무를 어루만지는 사이 어쩌면 나를 알아봤을 지도 모를 검회색 직박구리 한 마리가 날아와 나를 한참 바라보다 사라졌다. 어딘가 몸이 불편한 듯 천천히 천천히 매일 운동을 하시던 한 어르신이 어느새 내 등 뒤로 꽤 빠르게 뛰어가시는 모습을 보았는데 안경을 끼고 머리가 조금 벗겨진 푸른색 셔츠를 즐겨입으시던 키가 껑충한 이름도 모르는 그 어르신이 사라진 쪽을 한참 바라만보다 속으로 다행이야 정말 잘 됐어 생각만 하다가, 그 잘 타지도 않던 11번 마을 버스를 타고 짐을 찾으러 나는 다시 광화문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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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억수 같이 내리는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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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단에 심은 해바라기가 싹을 틔웠다. 오랜만에 도윤을 집 앞에서 만나 앵두 몇 알을 건네주었다. 옆집 할머니가 준 아마릴리스 꽃대도 곧 올라오겠지. 때죽나무 꽃은 숲의 별이 되어 있었어. 한여름 유카꽃은 달빛 같아. 털털한 접시꽃이 핀 동네를 지날 때, 방울새 한 쌍이 출렁출렁 날아갔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제비 새끼들 목소리에 눈길이 떨어지질 않고, 옆집에서 날아온 발간 장미 꽃잎이 마당에 톡톡 떨어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