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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인사 그리고 8/6-9/8

모두들 잘 지내시나요. 오랜만에 안부 전합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여기는 아직 여름 기운이 조금 남아있지만, 그래도 가을은 가을이네요.

그동안 새 앨범에 실릴 곡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제부로 곡 작업을 마무리했습니다.

지금부터는 만든 곡들을 몸에 천천히 새기고 다듬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몸에 노래들이 완전히 흡수될 때까지 서둘러 녹음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번에는 저의 목소리와 20 년 지기 기타로만, 최소한의 더빙으로, 앨범을 만들어보려 합니다.

그동안 곡들을 꽤 써왔지만, 문득 돌아보면 이 곡을 내가 어떻게 만들었 지, 기억이 잘 안 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꼼꼼히 기록을 하려고 하긴 했는데... 노래를 만든다는 건 여전히 참 희한하고 신비한 일입니다. 분명히 내가 한 건데, 조금만 지나도 내가 한 거 같지가 않아요.

저는 아직 촌스러워서 싱글도 EP도 아닌 정규 앨범을 생각하며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노래가 많이 만들어져서, 어떻게 나눠 들려드려야 가장 좋을까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곡이 안 써질 때에 비하면, 아주 행복한 고민이긴하지만요.

어제는 R.E.D 캠페인을 위해 만들었던 곡들이 공개되었습니다. 작년 겨울부터 두 계절 내내 매달렸던 곡들입니다. 많이들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10월 중순에는 서울 숲 재즈 페스티벌에도 참여합니다. 윤성씨와 호규가 이번에도 저와 함께 해주십니다. 그러고 보니 윤성씨를 처음 만난 지 올해 10 년이 되는 해네요.

종종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모두 평안하시길.

폴 드림.

8/6

5:22pm

노래 1을 만들다. 반 년 만에 노래가 왔다.

많이 울었던 날.

8/7

입추.

황금빛 반딧불이를 만났다.

노래2가 왔다. 조금 더 다듬어야한다. 그래도 골격은, 됐다.

8/8

6:17am

잠결에 노래2의 가사를 고쳐야겠다 싶어 깨자마자 서둘러 가사를 바꿨다. 한 번 틀이 만들어진 노래는 큰 걱정이 없다.

태풍 소식이 들린다. 무더위 속에 보현과 세 번 산책을 나갔다. 아내가 방울 벌레의 이름과 노래를 알려주었다. 누나가 좋은 꿈을 꿨다기에 천 원에 꿈을 샀다.

8/9

방울 벌레의 노래가 너무나 아름다운 아침. 해는 확연히 짧아졌고 새벽도 저녁도 짧아졌다. 가을의 그림자가 조금씩 짙어져간다.

7:52am

메트로놈을 켜고 그루브 연습을 했다.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을 모두 쓰기. 검지 손가락이 그루브의 키.

andante (78) <-> moderato (88)

처방받은 약을 귀에 넣었다. 나도 두 개의 마이크를 머리에 달고 산다는 걸 처음 느꼈다. 마이크의 다이아프램에 바람을 부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

병원을 오며가며, 백여 개의 스케치 화일들을 하나하나 들으며 추렸다. No. 397, 418, 422, 428, 436, 437, 451, 453, 454, 463, 465, 467, 474, 476

8/10

6:03am

14 개로 추려진 화일들을 다시 듣다. 한 번 꼬인 곡은 참 안 풀린다.

바싹 마른 날씨. 내일부터 비 예보가 줄지어있다.

Flo 첫 컨텐츠가 공개되었다. 귀 상태가 좋아지는 것 같지가 않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데, 잠자리가 하늘에 가득하다.

윤정, 기연 씨와 저녁을 먹었다.

8/11

비가 많이 내린다. 오랜만이다.

고모네 가족을 만나 차를 마셨다.

병원. ALT 수치가 정상이 되었다.

곡 생각. 시집 몇 권을 읽다.

헤드폰도 이어폰도 낄 수가 없다.

마음 아프고 화가 났던 그리고 반갑고 기쁜 하루.

8/12

비가 온다.

내 음악이 많이 사랑받고 싶다면, 나도 그만큼 많은 음악을 사랑해야 한다.

넓게 사랑받고 싶다면 넓게 사랑해라.

좁게 사랑받고 싶다면 좁게,

깊게 사랑받고 싶다면, 깊게 사랑해라.

8/13

그런데 예술가는 정말 세상을 사랑해야 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흐릿하게 비가 온다.

Flo 컨텐츠 관련해서 인터뷰를 했다. 화상 회의로 인터뷰를 하는 건 처음이다.

노래가 앞으로 좀처럼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다.

노래가 왜 나를 그렇게 찾고 있느냐고 내게 묻는다.

어둠 속에서 노래를 들었다. 눈을 감아야 노래만 볼 수가 있다.

8/14

비가 제법 온다. 다시 Song#1을 꺼내들었다. 오늘은 뭔가 소득이 있으려나.

새로 받아온 보이차에서 낯선 냄새가 났다.

노래 3, 노래 4 두 곡이 한꺼번에, 갑자기 오다.

Joze Gonzales의 인터뷰. "뭔가를 더하면 뭔가를 또 잃게 된다"는, 흔하지만 흔하지가 않은 말.

8/15

9:16am

노래 5 완성. 감사합니다.

마당의 자스민이 건강해졌다. 아내가 따온 자스민 꽃 한 송이를 찻잔에 띄워본다.

내 방의 라우팅을 고민하다. 채널이 부족하다.

8/16

모처럼 해가 뜬 날.

노래는 발신인을 알 수 없는, 그런 선물.

10:58am

기적 같이, Song#1이 노래 6으로 왔다. 감사합니다.

노래를 만드는 건 도시락을 싸는 것과 같다. 멜로디라는 도시락에 제일 어울리는, 알맞는 가사를 담을 수 밖에 없다. 넘쳐도 모자라도 안 된다.

8/17

간 밤에 신비한 꿈을 꾸었다. 과수원에 있는 어떤 퐁낭에 수많은 새 알이 주렁주렁 달려있었고 백로와 호랑이 새끼들이 오두막 처마 밑에서 크고 있는, 신비한 꿈이었다.

8:11am

노래 7 완성.

무표정한 연기를 하는 것과 연기에 표정이 없는 것이 다르듯이, 무표정하게 노래를 부르는 것과 노래에 표정이 없는 건 전혀 다른 것이다.

밭에서 산학 협력단 분을 만나 검수를 받았다.

풋귤을 조금 따왔다. 맛이 알차다.

예쁜 메뚜기 한 마리와 인사를 했다. 이러니 예초기를 돌릴 수가 없다.

오두막은 잘 있다. 칠을 하고 나니 긴 비소식에도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노래가 나를 신들린 듯 찾아온다. 기쁘면서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지 나도 알 수가 없다.

소나기처럼 노래가 내릴 때 영혼까지 끌어다가 빗물을 받아두어야 한다. 비가 언제 그칠 지, 한 번 그치면 언제 또 내릴 지, 아무 기약도 없으니까.

8/18

맑음. 맑음. 맑음.

샤워를 하다 물이 빠지는 사이에 커튼의 아랫도리를 비누로 씻어주었다. 누군가를 씻어준다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다. 때는 생각보다 빨리 떨어져 나갔다.

노래 7의 멜로디를 복기하는데, 뭔가 기시감이 있다. 좀 더 고민해야할 것.

오며 가며 우사미 린의 소설 <최애, 타오르다>를 다 읽었다.

회사 새 사옥에 가서 카카오TV 촬영을 했다. 촬영은 언제나 제일 어렵고 괴롭다.

8/19

소리는 내는 자의 것인가. 듣는 자의 것인가.

노래는 부르는 자의 것인가. 듣는 자의 것인가.

슬픔의 프리즘.

우리는 소리에 산다. 우리 자신의 소리. 혹은 타자의 소리 속에서.

- M. Grigoni

앰비언트 뮤지션 M. Grigoni의 글을 읽었다. 그가 신학자인 줄은 몰랐다.

앰비언트는 청자의 무심과 관심을 모두 가진, 존재와 부재가 공존하는 음악이다는 말.

집으로 가는 길. 아내에게 줄 꽃다발을 골랐다. 왁스플라워, 공작초, 범의 꼬리, 루스커스, 보리사초. 유칼립투스.

귀가. 진박새 한 마리가 소나무로 왔다.

너무도 크고 굵은 무지개가 대문 위에 걸려있었다.

Luna Monti와 Juan Quintero의 노래들을 테입에 담았다.

8/20

껍데기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으니 좋다.

11:34am

노래 8 완성.

호랑나비 한 마리가 초피 나무 근처를 맴돈다. 알을 낳을 곳을 찾는 듯 보였다. 너무 늦지는 않았을까.

산책을 하다가 제주 상사화를 만났다. 옅은 살구빛 한복 같은 옷을 입은, 귀한 꽃.

그리고 사위질빵.

8/21

스케치한 곡들을 다시 꺼내본다. Song#1은 노래 4가 되었고, 나는 Song#2로 간다.

비가 간간히 억수 같이 퍼붓는다. 태풍 소식이 있는데 열대성 저기압으로 작아질 듯도 하다. 카세트 테크가 또 고장이 났다. 호랑나비가 계속 화단을 맴돈다. 애벌레들이 많이 보이는데, 아기들을 지키기 위해서일까.

8/22

새벽. 비가 오지 않았다. 풀벌레 소리가 커진다. 점점 더.

9:37am

노래 9 완성.

8:33pm

major revision. 디미니쉬드 코드를 듬뿍 넣었더니 노래에서 허브 향이 난다.

8/23

비가 오락가락 한다. 노래9를 손질하고 계속 Song#2에 매달렸다.

누나의 검진 결과, 이상이 없다고 해서 마음을 놓았다.

몸에 다시 양진이 돋아서 약을 먹었다.

8/24

다행히 깨지 않고 잠을 잘 잤다. 병원에 가서 약을 더 타 왔다.

연보랏빛 나비들이 진귤 나무에 왔다. 알을 낳으려는 것 같다.

곡 작업을 하는데 아내가 산책길에 개머루 줄기를 따왔다.

원주로 카세트 데크를 보냈다.

8:35pm

Song#12 -> 노래 10 로 간다.

불을 끄고 노래를 듣는데 디스토션이 있다. 레벨 조정을 다 다시해야겠다.

8/25

6:34am

노래 10 의 멜로디 완성.

누나의 생일 선물을 보내고, 20 년 된 디스크맨을 수리 차 보냈다.

8/26

모처럼 쨍한 날.

스케치한 곡들 중,

Song#6, #8, #10, #11 -> 1 순위. Song#4, #5, #7, #12 -> 2 순위.

멧비둘기가 오랜만에 집에 왔다.

밭의 덩굴 걷기 작업. 오늘도 어김 없이 작업자 한 분이 벌에 쏘이고 낫에 베였다.

물이 새는 꿈을 꿨는데, 정말 오두막 1 층에 물이 샌다. 요즘은 내가 꾸는 꿈이 무섭다.

봉식 아빠가 꿈에 나왔는데 안부 문자라도 보내볼까.

밤에 보현이 또 잠을 깼다.

8/27

Song#3을 꺼내들었다. 과수원 덩굴 제거. 온통 사위질빵 꽃 천지다.

세상의 모든 덩굴들이 밭에 다 모인 것만 같다. 이전 작업 후 사라진 가위와 사다리를 찾아두었다. 나는 방충복이 있으니 겁날 게 없다!

누수 탐지. 에어컨 A/S call.

작업실 세팅 변경. 케이블 정리. 서밍 믹서 수리 보내고.

8/28

노래 11 시작.

해가 질 무렵. 도시락을 싸서 밤 소풍을 갔다. 앞이 보이지 않을만큼 어두워질 무렵 나타난 반딧불이. 보현은 반디를 보자 반디를 따라가며 짖어댄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먹는다는 건, 어둠 속에서 음악을 듣는 것 만큼 멋진 일이라는 걸 나는 처음 알았다.

시각을 둔화시킬 때, 세상은 귀와 입으로 집중된다. 과수원의 벌레 소리를 채집했다. 정확히 4년 전 오늘의 소리와 어떻게 바뀌었을까.

과수원 풀숲에 숨죽인 은빛 반딧불이. 내 곁을 지나 날아간 초록 반딧불이.

성택씨가 편집한 책을 보내주었다.

노래 11 송 폼이 영 어색하다.

덩굴 작업반과 통화를 했다.

8/29

노래 11 (from Song#3) 송폼 거의 마무리하다. 이 곡의 원형을 만든 지는 3 년이 넘는다. 골격만 남겨두고 싹, 뜯어고쳤다. 아주 심플하게. 그러나 그럴수록 베리에이션이 절대적이다.

장다리 물떼새 커플을 만나다.

마당에 생쥐 한 마리가 목덜미가 물린 채 죽어있다. 장미의 무덤 옆에 생쥐를 묻어주었다. 혹시 고양이가 보은을 한 걸까.

곡을 더 쓸 것인가. 잠시 멈출 것인가.

8/30

미도리 노트를 주문했다.

오늘 작업은 큰 진척이 없다. Song#8의 스케치를 들으며 다시 곡을 따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내가 만들어 둔 곡을 내가 다시 카피할 때, 은근히 기분이 좋다.

에어컨 기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급히 오두막으로 갔다. 결국 결론은, 에어컨의 누수는 아니다. 샤워 부스 바닥과 벽체 사이의 크랙이 원인인 듯. 원인을 찾았으니, 안심이다.

8/31

계속 노래를 쓰기로 한다. 빗물을 더 모아두기로. 비가 그칠 때까지. 혹은 물그릇이 다 찰 때까지.

10:42am

노래 12 완성. 예쁜 제목의 예쁜 노래.

지금까지 13 곡이 만들어졌다.

반딧불이를 보러 갔다.

9/1

아내가 서울로 갔다.

Song#10에 매달리다. 녹음 장비 세팅.

9/2

백련초 꽃이 예쁘게 피었다. 장다리 물떼새 두 마리를 보다.

집안 일로 정신 없는 하루였다. Song#10 약간의 골격이 보인다.

9/3

보현이 잠을 설치는 바람에 마루에서 쪽잠을 잤다.

이른 아침 산책길에 채운을 만났다. 물총새 세 마리를 보았다.

아내가 서울 특산물로 아펜젤러 치즈를 사왔다.

보현의 병원에 들러 선생님을 만나고, 카페에 가서 차를 마시고 돌아왔다.

9/4

가을 바람이다.

Song#10. 어느 정도 만들어졌는데 송폼이 불안정하다. 송폼을 다듬어야 하는데 보통 일이 아니네. 그러나, 솎아내는 고통은, 만들어내야 하는 고통의 천 분의 일도 안된다. '행복하기 그지없는' 고통인 것이다.

9/5

6:03am

노래 13 (from Song#10) 완성.

운동을 하고, 오야코동을 셋이 나눠먹고, 심바네에 가서 저녁 커피를 마셨다.

원주의 수리 기사님이 전화를 주셨다.

9/6

아내가 서울로 갔다.

도요새를 만났는데, 동정을 못하겠다.

노래 14 거의 완성.

9/7

실잠자리를 만나다.

9:00am

노래 14 '거의' 완성.

오랜만에 박각시를 만났다.

소나기가 내렸다.

아내가 돌아왔다.

9/8

6:50am

노래 14 완성. 러닝타임을 재어보니 11분이 넘는다.

'옥수수 볶는 남자'

경천에게 전화가 왔다. 10 년 만인가. 녹음을 하러 제주에 왔단다.

노랑발 도요를 집 앞에서 만났다. 종추.

아내의 다리를 베고 누워 아내가 쓴 글을 들었다. 작년 오늘 태풍 마이삭이 왔었구나. '장미는 고향집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 는 문장이 가슴에 남았다.

R.E.D 캠페인의 곡이 공개되었다.

여름이 끝나는 날. 곡 작업이 비로소 마무리 된 저녁에 우리는 조촐한 파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