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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21

4/1

4월. 거짓말처럼 제비가 왔다. 우리집 소나무에서 멧비둘기가 알을 품고 있다. 보일러가 고장이 났다. 보일러 없이 지내기엔 아직 추운 날이다.

4/2

보일러 공사가 마무리 되지 않았다. 집을 비워야할 즈음 기사님이 오신다기에 대문을 열어두고 집을 나섰다. 문을 열어두고 나갈 수 있는 동네에 산다는 게 여전히 신기하다.

해가 나면 따뜻하고, 해가 사라지면 금세 공기가 식는다. 바람골이 지나는 과수원은 아직 겨울이다. 그래도 땅은 이미 봄이다. 나무 아래로 온갖 덩굴 손이 하늘을 향하며 무엇이라도 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묵은 덩굴을 걷어내는 게 가지치기의 반이다. 천 평의 친환경 농사는 3 천평의 관행 농사 만큼 품이 드는 것 같다.

무성해진 귤나무에 새들이 떠난 빈 둥지가 많이 있다. 깍지벌레가 모이기 시작하고, 칠성무당벌레도 드문드문 보인다. 레몬 꽃눈이 탱글탱글하다. 레몬 꽃이 귤꽃보다 먼저 오겠다. 올해에는 더 많은 레몬이 열릴 것이다. 아내가 바싹 마른 뱀 허물을 보여주었다. 모든 것이 어김 없이 찾아오고 물러간다.

밭 입구에 핀 유채꽃이 시들시들하다. 누군가 제초제를 뿌리고 갔나보다. 꽃에 까지 제초제를 뿌리는 마음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알을 품던 비둘기가 보이지 않는다. 옥상에서 내려다 보니, 둥지에 알도 없다. 보일러 수리를 마친 기사님이 문을 훤히 열어두고 가셨다.

4/3

2 년 전 오늘, 먼지 한 톨 없이 맑았건 하늘이 생각나. 파란 하늘에 둥둥 떠있던 분홍빛 꽃은 잔뜩 물이 올라있었지. 물결처럼 사람들이 밀려들던, 공원 아닌 공원에서 노래를 부르고 둘러둘러 산길을 내려오던 2 년 전 그 날.

free tempo 데모를 다 지우고, 다시 in time으로 녹음을 했다.

낮에는 반팔에 바람막이 하나만 입고 일을 해도 충분히 따뜻하다. 좁쌀만한 꽃눈이 보인다. 꽃눈을 보며 하는 늦깎이 전정. 휘파람새가, 멧새가, 동박새가 노래를 부른다.

집에 돌아오자 아내가 나를 소나무 아래로 데리고 갔다. 갈색 솔잎 더미 위에 비둘기 알 하나가 부서진 채 있다. 엄지보다 작고 하얗다. 어미의 솜털 하나가 껍질 위에 붙은 채 바람에 떨고 있었다.

앵두나무 아래에 알을 묻어주었다. 서쪽 바다 위에 별무리 진 별 하나가 떠있다.

4/4

아침 일찍 아내의 시를 읽었다.

유채꽃 한 송이가 마당 구석에 피어났다. 어디에서 왔을까.

몸이 좋지 않아 일을 쉬었다.

팬이 건네준 구근에서 하나둘 꽃이 핀다.

봄눈이 흐드러진 한 낮. 보현과 걸었다. 보현의 코 끝에 꽃잎이 내리앉았다. 아내의 복통이 심해 걱정을 많이 하였다. 밤 목욕을 하고 돌아왔다.

4/5

복수초가 핀 숲 속에는 별꽃도 금강 제비꽃도 피었다.

아무도 없는 어느 동산을 걷다. 철저히 계획대로 심겨진 나무와 풀과 연못과 억새와,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인위적이라 오히려 너무나 자연스러운 동산. 철제 빔으로 뼈대를 짠 작은 건물의 판재와 판재 사이로 온갖 소리가 스며들었다. 억새가 몸을 부비는 소리. 바람이 땅을 훑는 소리. 소리의 체를 지나 걸러진 신기한 사운드 스케이프를 녹음기에 담아왔다.

바람이 찬 날이다. 소주를 마셨다.

4/6

⟪물이 되는 꿈⟫의 가제본이 왔다.

가지치기를 할 때, 나는 나무 주 변을 빙빙 돈다. 옆 나무도 살펴야 한다. 나무 한 그루의 꼴과 주변 나무와의 균형을 살피며 조금씩, 천천히 자르고 다듬는다. 살릴 가지와 잘라낼 가지를 정해야 하고 어느 지점에서 잘라야 할 지를 정해야 한다. 솎아낼 순을 정해야 한다. 모든 순간, 선택해야 한다.

꽃눈 주렁주렁한 순은 얼마나 예쁜지. 하나같이 기특하고 아깝다. 모두 키우고 싶지만, 안 된다. 그런 내 욕심부터 잘라내버려야 한다.

여름 순이 건강해. 귀한 순들을 잘 지켜냈어.

남해에 보낼 액자에 사인을 했다. 저녁에는 경호를 만나 스시를 먹었다. 10 년의 인연이 감사하다.

4/7

바실러스 액비 발효를 시작했다. 물 200 L에 미생물 원액 (작은 것) 2 통, 집에서 갈아온 청국장 800 gr을 넣고, 당밀 한 통을 넣는다. 잘 저어서 40 도로 은근히 끓이며 열흘 간 발효시키면 향긋한 액비가 된다. 당밀은 미생물의 먹이가 될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영양 덩어리이다. 특히 마그네슘이나 철분 같은 미네랄이 많다.

맛있게 잘 익어서 땅과 나무를 행복하게 해 주거라.

432 Hz로 튜닝할 수 있는 튜너가 도착하였다. 밀린 우편물을 보냈다. 커다란 보름달이 하늘에 떴다. 소원은 빌면 빌수록 가짓수가 늘어난다. 아차 싶어 모두 잘라내고 하나만 빌었다.

세잎 클로버의 이름은 '일상'. 네잎 클로버의 이름은 '행운'. 다섯잎 클로버는, '운명'.

4/8

여전히 시린 날이다. 밭에서는 바람 막이 안에 스웨터를 덧대 입어야 한다. 천천히. 천천히. 일을 한다. 천천히. 할 수 밖에 없다.

새벽녘 아주 잠시만 작업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일상의 모든 것이 느려졌다.

물 속에서 30 분을 걸었다. 물 밖으로 몸을 끄집어 내는 것이 아직 버겁다.

4/9

물빛 같은 음악을 만들고 싶다. 너무나 물과 같아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아도.

나는 더 용감한 사람이 되고 싶다.

마음에 닿는 것도, 닿지 못하는 것도 운명이다. 쓸쓸해져도 수긍해야 하는 것들이 세상엔 많이 있다.

풀잠자리가 날아왔다.

누군가 짓다만 둥지가 있었다. 이 나무는 손대지 않는 게 좋겠다 싶어 한 발 물러났다.

4/10

태어나서 처음으로 새를 죽였다.

4/11

나는 왜 하필 그 길로 갔을까. 나는 왜 하필 그 속도로 트럭을 몰았을까. 너는 왜 하필 그 시간, 그곳으로 날아들었을까. 우리는 왜 넓고 넓은 세상 한 가운데에 살다가, 하필 그 곳 그 한 점에서 부딪혔을까.

이삭처럼 늘어지던 네 목.

작약 아래 땅을 파서 동박새의 머리를 서쪽으로 뉘이고, 흙을 덮었다. 비자 나무 아래에 핀 프리지아와 갓꽃 한 송이를 꺾어와 기도를 했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마당의 호제비꽃은 어디서 왔을까.

장대 비가 쏟아진다. 키가 훌쩍 큰 튜울립이 스러졌다. 아무리 북돋아줘도 스러질만큼 키가 커버렸다. 마도요 한 쌍이 집 앞 바다로 왔다. 선휴씨를 만나서 점심을 먹었다.

4/12

앵두가 초록빛으로 여물었다. 빠르구나.

산간에는 대설경보가 내려졌다.

4/13

첫 방제를 했다. 1000 L에 보르도칼 두 봉지를 섞었다. 기계유유제 없이 보르도액 방제만 한다. 두번에 나눠하기로 한다.

작년에 비한다면 더뎅이병 흔적이 많지 않아 다행이다. 흡입 호스에 구멍이 나서 테플론 테잎을 임시로 감고 작업을 했다. 날이 춥고 강풍이 부는 날이다. 무리하지 않고, 사고 없이 할 수 있기를 기도했고, 거짓말처럼 바람이 잦아들었다. 사전 투표를 하였다.

4/14

두 번 째 방제. 어제보다 기온이 5-6 도 높고 바람이 약하다. 약 치기 좋은 날이다.

보현과 한 번도 함께 가보지 못한 곳으로 저녁 산책을 갔다.

4/15

기쁨과 슬픔이 함께 한 날.

4/16

노래를 마치고 꾸벅 인사를 해도 박수 소리 하나 없던 무대. 빠짐없이 마스크를 쓰고 있어 누가 누군지, 무슨 표정인 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던 성긴 객석. 사람들은 2 미터 넘게 띄엄띄엄 놓인 의자에 앉아 부동 자세로 노래를 들어주었고,

햇살이 따가운 날이다. 지판을 짚은 손가락을 보며 노래를 부르는데, 덥지도 차지도 않은 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와 기타 헤드에 달린 노란 리본이 나풀거렸다. 나는 꿈을 꾸듯 노래를 불렀다.

4/17

비가 오다.

액비 발효 끝. 전원을 내리고 수리한 흡입 호스를 창고에 두고 돌아왔다. 찔레 덩굴을 다듬었고 벽에 유인선을 달아주었다. 작약 꽃이 피었다. 첫 꽃 송이를 동박새에게 보냈다.

효진씨가 소식을 전해왔다. 평안히 잘 지낸다는 말에 무엇보다 안도했다.

4/18

아내는 액비를 통에 담고, 나는 집안 일을 하였다. 제비들이 혹시라도 낯설어 할까봐 둥지 아래 받쳐둔 나무 판을 빼주었다.

4/19

라이브와 촬영, 회의아닌 회의를 하다 보니 새벽 3시가 넘어버렸다. 꼬박 하루를 깨어있다.

4/20

쉬지 못하면 너무 아프다.

내 몸은 내가 아니므로, 나는 내 몸을 돌봐야 한다.

4/21

샘의 OP-1을 빌려왔다. 악기 하나를 배우는 건, 언어 하나를 배우는 것과 같다.

소리를 쌓아 음악을 만드는 법. 혹은 소리를 깎아 음악을 만드는 법이 있다. 모든 음악은 어차피, 침묵과 소음의 사이, 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왠지 모르게 위안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