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비가 많이 온 날. 새로운 노래 작업을 시작했는데 신통치 않다.
BBBBBGA
나를데려가줄래?
AABAGEGG
슬픔이없는곳으로
서울에 두고 온 나일론 기타 생각이 간절하다.
2/2
Song#7가 갑자기 태어남. 아침에 본 책 표지에 적힌 글 한 줄이 노래의 실마리가 되었다.
식물을 좋아하다 보니, 저는 제가 식물이 된 것만 같습니다.
길게 쓴 가사를 지우고 단순한 송폼으로 다시 만들었다. 그렇게 1절만 남기다시피한 노래를 아내와 보현에게 들려주었다.
2/3
다시 추워진다. 노래의 2절 가사를 살리고 송폼을 정했다. 진수에게 데모를 보냈다. 공연 때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하고 쉽게 노래를 만드는 게 점점 힘들어진다. 그걸 느낄 때마다 'unlearn'이 얼마나 어렵고도 중요한지를 깨닫는다. 미선이 노래를 셋리스트에 넣은 건 잘한 결정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회고의 힘으로 unlearning 해보기.
큐시트를 정리해서 공연팀에 넘겼다. 날이 추워진다는데 관객분들 대기 공간이 마땅치 않아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다.
2/4

11번 째 리허설. 패러랠라이저를 써보았고 피에타 뒷부분에 Mood II를 과감히 쓰기로 했다. 정말 '미친' 것 같은, 그런 '무드'를 위해. 연습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퀵으로 케이블을 시켜두고 페달보드를 다시 세팅했다.
허상점과 라마홈에서 옷을 보내왔고, 집에서 갖고 오지 않은 옷을 아내가 택배로 보냈다.
2/5

Cecília가 추천한 영화 <The Room Next Door>를 보고 와서 종일 연습. 페달 밟기가 익숙해지려면 노래하면서 '정확히' 밟는 연습을 계속 하는 수 밖에 없다. M-vave와 Blooper 연결이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좌절하다가, 우연히 TRS-2TS 스플릿 케이블을 꽂았더니.. 된다! 그래서 스플릿 케이블 하나 급히 주문.
2/6


눈이 엄청나게 내린 날. 사전 리허설하다. 공연장은 너무, 정말 너무 춥다. 스탭들은 난리가 났고, 진수와 서윤은 손이 많이 시린 것 같다. 열풍기와 담요를 급히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2/7

공연 첫 날. 첫 공연의 고유한 '에너지'가 그대로 드러난 날. 이런 날에는 디테일은 전혀 중요치 않다. 관객과 연주자들의 에너지가 그냥 모든 걸 끝내버린다. 진수가 오늘까지만 악보를 보고 하겠다고 했다.
2/8

둘째 날. 세 명 모두 all black으로 옷을 입고 무대에 섰다.어제보다 날은 풀렸는데 공연장은 더 춥다. 관객들이 추워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에 동요가 일어났다. 이러면 안되는데. 늘 그랬듯 차분했던 토요일 공연. 미스테리한 금-토-일 공연의 패턴.
2/9

마지막 날. 예상대로 첫째 날과 둘째 날, 그 사이 어딘가의 바이브, 아주 적당한 에너지과 호응, 정교함, 잘 제어된 사운드. 좋았다.
고맙습니다. 이 추위 속에서 말도 안 되는 듯 보였던 공연을 모두들 덕분에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2/10
아침에 상순+효리와 영화 <메모리>를 보고, 세종에서 정마리 님, 부지현 작가님, 피디님, 무대 디자이너 님과 미팅을 마치고, 집으로.
2/11
휴식.
아내 휴가 숙소 예약. 냉장고 수리 기사님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그냥, 새로 하나 사시죠?" 우리집 냉장고는 이제 스무살 쯤 됐을까.
앰비언트 세션 장비를 담아갈 28 인치 케리어를 주문했다.
2/12
효진씨에게서 문자. 아직까지도 섭외 연락이 효진씨에게 가는 모양이다.
휴식. 운동. 2월에 농장일을 하기는 글렀다. 일단 너무 춥고, 지금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2/13
4월 엄마+삼촌들 여행 숙소 예약. 휴식. 운동.
2/14-17

아내는 휴가를 떠났고. 지구 상회에 들러 스피커 점검을 해주고 브루스에게서 빌린 삼각대를 돌려주었다. 보현을 돌보고, 앰비언트 세션 세팅을 하고, 보현 밥을 만들고, 동원 씨를 잠시 만나고, 집안 일을 하고, 맛있는 것을 만들어 보현과 나눠 먹었다. 패러랠라이저로 페달 보드 세팅을 하다가 Chroma console로 교체했다.
제주살이 12년 만에 처음으로 치킨을 사먹었다.
원고 제안을 잠시의 고민도 없이 (정중히) 거절했다. 지금의 나는 더욱 선명해진 것 같다.
2/18
서울에 다녀온 후 눈이 가려워 안과에 들렀더니, 선생님은 별 고민 없이 '알러지' 질환 같다고 하신다.
기타를 들고 앰비언트 작업을 처음 해 보다.

출장 짐 꾸리기. 큰 트렁크 1개 하고도 반+배낭의 2/3가 장비로 꽉 차버렸고, 나머지 공간에 카메라, 필름, 2주 간 입을 옷을 겨우 넣었다. 하지만 작년에 비하면 장비가 얼마나 컴팩트해졌나. 혼자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가방 세 개에 모든 장비를 넣을 수 있다는 게 생각할수록 뿌듯하고 기쁘다. 지구 끝이라도 가서 공연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묵음에 갔더니 잘 다녀오라며 친구들이 드립백을 안겨주었다. 무척 기쁘다.
2/19
서울행.
2/20
올가 토카르추크의 책을 읽으며 바르샤바를 경유, 자정 무렵 탈린에 도착. 짐을 찾고 게이트 밖으로 나가는데, 세상에.. 지갑이 없다. 갑자기 노래진 유럽 하늘.
바르샤바에서 흘렸나. 라운지에서 도둑 맞았나. 멍한 머리를 굴리다가, 문득 기내 짐칸에 올려둔 백팩을 다른 곳으로 옮겨 넣던 승무원 모습이 떠올랐다. 급히 공항 직원에게 얘기를 하니 경찰에게 연락해보라며 전화 번호를 준다. 만일 바르샤바에서 잃어버린 거라면 정말 낭팬데.
전화를 하니 다행히 경찰이 영어를 한다. 지갑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엇이 들었는지 꼬치꼬치 묻던 그가 인포메이션 데스크로 오란다. 여전히 멍한 기분으로 그를 기다리면서 온갖 생각을 했다. 혹시 안 오는 건 아닐까. 다른 곳으로 간 건 아닐까. 그 순간, 텅빈 공항 청사 멀리 보이는 금발의 아주머니. 그리고 손에 들려 울고 있는 내 지갑.
연거푸 감사 인사를 드리고 꼼꼼하게 서류도 쓰고 지갑을 펼쳤는데, 카드가 하나도 없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다른 주머니에 카드들이 죄다 들어가 있었다. 앞으로 착하게 살겠다고 다짐하며 짐을 끌고 택시 승강장으로. 그리고 숙소로. 감사하고도 쫄깃했던 탈린에서의 첫 밤.
2/21



아침에 일어나서 (꽤 잘 잤다.) 오전 시간을 여유있게 보내다가, 탈린 구도심 (vanalinn이라 부른다)을 다녔다. 카메라 필름 감개가 뻑뻑해서 걱정이었는데 사진 찍는데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만, 다 찍은 필름을 되감을 때가 조금 걱정이 된다.


제주와 서울의 중간 정도의 추위랄까. 결국 오후에는 비니를 썼다. 저녁을 거르고 (점심을 너무 많이 먹었다.) 7 시에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발레 <지젤> 보다. 너무, 좋았다. 발레를 보고 시내 드라이브를 하고 돌아와 안약을 넣고, 씻고, 11시 반 즈음 잠들다.
2/22
새벽 5:20 쯤 잠이 깨서 일기를 쓰고,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을 읽다. 충분히 잔 것 같다.
수관, 우듬지와는 또다른 '나무초리'라는 낱말을 처음 배웠다.
Arvo Pärdi Keskus (아르보 페르트 센터)에 갔다. A.P.K는 탈린에서 차로 40 여분 떨어진 Laulasmaa 라는 곳에 있었는데, 막상 가보니 마을이라 부르기에 인적도 드물고 휑한 곳이었다. 주차장에서 내려 소나무 숲을 가로질러 5 분 쯤 걷다 보니 멀리 A.P.K. 가 보였다. 나는 이 길이 한국의 절에 이르는 길을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센터는 온통 '나무'다. 어딜가나 나무 향기가 날 것 같은 빛깔의, 그리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나뭇빛 조명. 아르보의 사진과 글귀, 직접 그린 악보가 있고 앨범과 책도 팔고 있다. 포르토벨로 버섯을 넣은 크림 리조토를 먹었는데 지금까지 먹어본 리조토 중 가장 맛있었다. <Every sound a jewel>이란 다큐멘터리를 보았고 센터 안에 있는 작은 정교회 예배당에서 아내를 위해 기도를 했다.


예배당 옆에 놓인 두 개의 작은 청동빛 종을 보았고, 타워에 올라가 센터를 포근히 감싸안은 소나무 숲과 저 너머 펼쳐진 무채색 발틱 바다를 보았다. 카메라에는 컬러 필름을 넣었지만, 흑백 필름으로 사진을 찍어도 큰 차이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옅은 색조 화장을 하는 정도, 아닐까. 푸르고, 검고, 짙고, 어두운 바다. 하늘, 나무, 눈. 그 가운데 정말 '색깔'이라 부를 수 있는 건, 센터 안의 온화한 빛 그리고 커튼 너머로 보이던 붉은 벽돌빛 알리나 하우스 밖에 없다.
다시 오고 싶다는, 더 찬찬히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탈린으로 돌아온 저녁. 이 짧은 여행 하나만으로도 에스토니아 여행은 충분히 충만했다.
2/23

<클라라와 태양>을 마저 다 읽고, 탈린을 떠났다. Pärnu의 바다는 수평선까지 얼어있다. 파도도 물결도 모두 하얗게 꽁꽁 얼어있었다. 시간과 세월이 얼어붙은 듯한 바다를 아무리 바라봐도, 파도는 밀려오지 않았고 포말은 부서지지 않았다.



탈린에서 리가까지 가는 길. 고속도로도, 국도도 아닌 것 같은, 넓어졌다 좁아졌다가 반복되는 Via Baltica를 따라 리가로. 위가 안 좋은 건지, 차에서 안 좋은 냄새가 나서 그런지 멀미가 심했다.

리가 구도심은 탈린과 완전히 다르다. '전형적인' 느낌이랄까. 동유럽과 북유럽이 섞여있는 듯한, 그렇지만 알 수 없이 안온한데 이유는 모르겠다. 저녁에는 토속 (관광) 식당에 가서 농어 구이, 호밀 스프 등을 먹었고, 꿀로 만든 맥주 맛을 보고 호텔로 왔다.
2/24
간밤에 조금 불안한 꿈을 꾼 듯 싶지만 귀마개와 안대 덕분에 잘 잤다. 오늘부터 레지던시가 시작된다. 마음이 요동치고 울렁거린다.



에리카 신스 도착. 카트리나의 안내로 기르츠 (사장님)과 인사. 스튜디오는 생각보다 작았지만 별다른 기대를 했던 건 아니라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건물 입구부터 엄청나게 큰 모듈러 시스템이 걸려있고, 스튜디오에서는 부클라와 세르쥬 신스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온갖 계측 장비들, Polysix, Juno106, Yamaha DX7 등등 역사와 전통의 악기들이 줄줄이 놓여있고, Matriach, Little Phatty 같은 신생악기(?)들도 보인다. 각종 이펙터들은 여기저기 그냥 '굴러다니고' 있다. 에리카 신스의 리버브, 딜레이를 써보고 싶어서 아무리 뒤져봐도... 그건 또 없네.
짐을 풀고 세팅을 하고 시장에서 점심을 먹고 컴백. Juno를 써볼까. Polysix를 써볼까. 고민하다 연결을 하는데,
안 된다. 미디가 안 된다. 왜 안 되지? 그곳에 있는 커넥터라는 커넥터는 모두 테스트해보지만 아무 것도 안 된다.
결국 인터넷을 뒤져 Zoom L6의 TRS-DIN type이 안 맞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사장님에게 이 얘기를 하니 고맙게도 선을 끊고 다시 납땜을 해서 가져다주신다. 아.. 제대로 세팅만 하는데도 얼마나 시간이 걸리려나.
2/25

둘째 날. 기르츠는 이런 저런 악기 - 이를테면 Steiner-Connolly의 Synthacon도 써보고 큼지막한 '진짜' 플레이트 리버브도 써보라고 하시고, 릴데크도 써보라 하시고 (칼리브레이션은요?). 하지만 이것저것 다 써보기에 시간이 없다.
'평롱'으로 작업 시작. 이것 저것 해보다. 벽에 걸린 Squier 스트랫을 꺼내 기타로도 작업을 해보고 (넥이 무섭게 휘어있었다..) Polysix, Synthacon을 연결해서 소리도 받아보았다. 역시 빈티지 악기들은 노이즈가 많구나.
점심 시간, 직원들이 배달 음식을 시켜주어 같이 먹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깐풍기 같은 것이었는데 감사히 주는대로 먹긴 했으나 속이 부글부글.


에밀스, 얀스와 길고 재미있게 수다를 떨었고, 묵음 커피를 드립백으로 내려주었더니 몹시 신기해했다. 즐겁게 놀다 작업을 하고 돌아오는 길, 올드타운에서 지니, 한스를 만났다. 산자나무 (sea buckthorn) 차를 마셨더니 속이 너무나 편해졌다! 저녁에는 라트비아 블랙 발삼도 한 잔 마셨다. 좋다. 생약 같아.
2/26

아침에 거울을 보는데 왼눈 안쪽이 심하게 충혈되어있다. 공연의 압박이 슬 밀려오는건가. 가자마자 Polysix, Synthacon으로 루프를 만들려는데, UHER 레코더에 녹음이 안 된다. 허허. 여기까지 들고 오다가 망가졌나. 속상하고 황당하고 난감하다. 일단 새로운 루프를 만드는 건 포기. 다행히 재생은 된다. 정말 다행이다.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빨리 받아들이기로 하고) 라이브 세션 정리. Aviiir는 못할 것 같고, 그냥 Microcosmo - 평롱 - DDW II 순서로 해야할 것 같다. 그러면 대략 30 분 정도 셋은 되겠다.
기타 들고 평롱 작업. 나쁘진 않은데 100% 좋지는 않다.
세션 프로젝트를 정리하고 게인스테이징 다시 하다. 기르츠 사장님 다시 등장. 최근에 에리카에서 만든 딜레이 유닛인데 한 번 써보겠냐고 Echolocator를 건네준다. 정말 좋다는 말과 함께 건네준 악기에는 빨간 박쥐가 그려져 있다. 곧 출시될 페달의 프로토타입인가 본데 조금 써보다가 포기해버렸다.
카트리나가 라트비아 전통 요리를 해주겠다고 해서 부엌에 갔다. 갈색 병아리콩 삶은 것 + 작게 자른 라드 큐브 볶은 것 + 양파 볶은 것 + 사워 크림 = 요리. 이름이 뭐냐 물으니... (그냥 갈색병아리콩돼지고기양파볶음이라나.) 밥을 먹으며 라트비아 뮤지션과 얘기를 나누다가 다시 스튜디오로.
사장님 표 딜레이 유닛에 DDW II 루프를 걸었는데, 피치쉬프트 기능을 쓰니, 오... 끝내준다. OK. 이건 내일 쓰기로.
어느 정도 공연 윤곽도 잡고 게인스테이징도 되었지만, 여전히 평롱은 썩 마음에 안 들고, 머리는 지끈지끈하고.

5:30 즈음 퇴근.
나는 왜 '잼'이나 '즉석 가사 쓰기' 같은 걸 좋아하지 않을까. 내가 100% 원하는대로, 최적화 값으로 세팅된, 정확히 콘트롤할 수 있는 환경에서 고도로 집중하고 정교하게 음악을 만들 때, 비로소 결과물이 (겨우) 나오는 건 알고 있기에 그런 건 아닐까. 아무리 좋은 장비와 악기가 있다 해도 창작 혹은 creativity에 직결되는 건 아니라는 것. 생경하고 불편하고 익숙치도 않은 환경에서 사운드 작업을 한다는 건, 나 같은 이에게 그리 큰 메리트가 있는 건 아니라는 깨달음.

나는, 내가 '음악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레지던시에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이거구나.
일렉 기타를 어깨에 메고 공연을 하는 게 얼마만일까. 그런데 그것이 락도, 팝도 아닌, 앰비언트라니.
식당에서 오리고기와 IPA 두 잔을 먹었다. 충만하다. 어차피 세팅도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고 내일은 느즈막히 나갈까. 밤에 핸드폰 충전기를 사러 올드타운을 헤맸지만, 결국 못 사고 AA 배터리만 (테입 플레이어 용) 사서 들어왔다.
2/27
아침에 일어나 사우나를 하고 천천히 나가기로 마음먹다. 어제 무리를 했는지 (정신적+육체적으로) 몸이 힘들다는 사인을 보냈다. 수영장에 들어갔다, 습식 건식 사우나를 번갈아 하다, 걷다가... 거의 11시 까지 물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방에 올라와 파스타를 시켜먹고 공연장으로.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구나.
스튜디오에서 개러지로 장비를 하나씩 옮기는데만 시간이 꽤 걸렸다. 사운드 체크를 하긴 하지만, 내가 만진 소리가 믹서에서 스피커로 그냥 나가는 상황이다. 유럽인 기준이라 그런지 데스크 높이가 꽤 높은데, 퍼포먼스하기엔 딱 좋다.


함께 공연을 하게 된 마리오는 앞을 보지 못한다. 기르츠는 그를 라트비아의 첫 맹인 디제이라고 나에게 소개했다. 마리오는 확실히 긴장한 것 같았지만, 양손으로 드럼머신, 모듈러, 베이스라인, OP-Z를 더듬으며 연주하는 모습은 정말 놀라웠다. 기르츠는 에리카 신스에서 시각장애인 뮤지션을 서포트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나중에서야 그의 아들 크리스토퍼가 장애인이란 걸 알았다.
기타 스탠드가 없어서 백팩에 기타를 기대놓았다. 마지막으로 일렉기타를 메고 공연을 한 게 옐로우몬스터즈 공연 게스트 때가 아니었나 싶은데.

사운드 체크를 하고 사진 촬영을 하다. 사진 작가님께 '나는 별로 안 좋은 (서투른) 모델'일거라 얘기했더니, 여기 오는 레지던시 아티스트들이 다들 똑같이 그렇게 얘기한단다. 계단에서, 소파에 앉아, 2층 통로 다리에서... 사진을 꽤 많이 찍었다.(찍혔다.) 조명도 준비를 많이 했고 '피사체'를 편하게 해주는 작가님. 세계 어디를 가나 인물 사진을 찍는 사진가들은 그런 공통점이 있나보네.
마리오가 사운드 체크를 끝내고 다시 내 장비를 세팅해두고 돌아와, 추가로 더 사진을 찍었다. (찍혔다.) 그때 동양인 세 분이 등장.

한국 대사관에서 세 분이 예쁜 프리지아+알파 꽃다발을 갖고 오셨다. 그 중 한 분이 기르츠의 이웃인데, 공연 소식을 듣고 처음엔 안 믿었다고. 반갑게 인사를 하고 공연 시작을 기다렸다.

그 사이 카메라맨들이 세팅을 하고, 조명 감독 친구가 어떤 게 마음에 드냐고 물어본다. 솔직히 뭘 하나 상관없을 듯 하지만, 고민하는 척하다가 블루톤에 약간이 무브먼트가 있는 버전을 골라주었다. 그나저나 여기는 조명도 모듈러 시스템으로 한다.
카트리나가 공연 전에 한 말이 있으면 하라고 해서 곡 설명을 간단히 했다. 그리고 공연 시작.
- Dancing with Water II
- 평롱 (voice: 정마리)
- Microcosmo




큰 실수나 무리 없이 잘 끝냈다. 꽃다발도 받고 박수도 받고.
재빨리 악기를 해체해서 스튜디오로 다시 옮겨두고 마리오의 퍼포먼스를 보았다. 에리카 신스의 베이스 라인과 드럼 머쉰 (Perkons), 모듈러 시스템 (피코), OP-Z로 연주하는 테크노였다. 베이스 라인의 소리는 굉장히 원초적인데, 너무 너무 좋다. 강렬하고, 쫀쫀하고... 필터가 좋은 건지, 암튼 굉장히 inspiring해.
공연이 다 끝나고 카트리나가 '공연이 정말 좋았다'고 칭찬을 해주었고, 에밀스가 '지금까지 했던 EG 라이브 중 가장 좋았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기뻤다.


이 사람 저 사람 인사를 하고 (그때 처음 크리스토퍼와 인사를 나눴다. 기르츠의 아들이란 건 나중에 알았지만) 대사관 분들이 식사를 같이 하러 가겠냐고 하셔서 같이 올드 타운의 피자집으로 갔다. 실무관 세 분 중 한 분은 리가에서만 10 년 째 근무중인 셀티 아빠이시고, 또 한 분은 3년 째 리가에 있는 고양이 엄마. 또 다른 한 분은 올드 타운 근처 집에 들러 강아지 '꼬모'를 데리고 조금 늦게 식당으로 오셨다. (꼬모는 아빠가 집에 늦게 와서 그런지 계속 낑낑댔는데 저녁도 못 먹었다고 했다.) 즐겁게 같이 밥을 먹고, 라트비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맥주도 마시고 (피자에 진짜 트러플 편이 올라와 있던 것 같다.) 발삼 한 병과 자석 선물까지 받고 호텔로 돌아왔다. 기쁘고 충만했던 기억.
2/28
아침을 먹고, 씻고, 여유있게 에리카로 갔다. 10시 조금 넘어 도착해서 짐을 쌌다. 아... 너무 많아. 왜 짐은 돌아갈 때면 늘 몸집이 불어있는 걸까.
은색 트렁크에 어찌어찌 장비를 챙겨넣고 30 분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카트리나와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도중 내가 '화학자'였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카트리나는 자기는 Biomedical Engineer라고 했다. 기르츠와 인사를 하러 올라갔는데 '발렌시아가' 스타일이라며 반짝반짝하는 재질의 조끼를 선물로 주었다. 정말, 진짜 너무 따뜻한데, 정말 너무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기르츠는 내가 빌뉴스로 간다는 얘기를 듣고, 좋은 뮤지션 친구가 있다며 소개를 해주었다. 사양하기도 그렇고 해서 일단 연락처를 받아왔다.
큼지막한 조끼를 받아 입고 택시를 부르는 사이 에밀스와 얘기를 나누었다. 에밀스는 공연이 정말 너무너무 좋았다고 말해주었다. (카트리나는 그가 정말 까다로운 친구라고 귀띔해주었다.) 에밀스와 작별 인사, 바이바이 허그를 하고, 호텔로. 이제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되는 기분. 샤워를 한 번 더 하고 밖으로 나갔다.
Kalve라는 카페에 가서 필터 커피를 시켰는데, 별로다. 카페에서 아내에게 엽서를 쓰고 우체국으로 갔다. 바코드가 달린 전자우표가 봉투에 붙었기에 사실 우표는 따로 필요없음에도 기념으로 우표 두 장을 골라 꼭 붙여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가짜 스탬프까지 찍어주시는 직원분의 센스.






국립 미술관에 가서 전시를 보고 정교회 성당으로 가서 아내를 위한 기도를 했다. 계속 걸어서 쇼핑몰로 갔지만, 누나가 부탁한 헤어 제품은 못 찾고 보현과 문수에게 줄 간식만 한 봉지씩 샀다. 올드 타운으로 다시 와서 카톨릭 성당에서 초를 밝히고 기도문을 적어 넣고 기도를 했다. 호텔까지 걸어와서 물 속을 걷고 사우나를 하고 또 샤워를 하고 식당에서 스테이크와 피노누와 (뉴질랜드) 두 잔을 마시고, 산자나무 차를 한 포트를 행복하게 마셨다. 차에서 생강과 쥬니퍼 잎 향기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