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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31 가을 인사

이른 가을 인사 드립니다. 모두들 잘 계실까요.

저는 여느 해보다 열심히 나무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애쓴다해도 늘 힘에 부치는 게 농삿일이라 때론 막막하지만, 그래도 음악과 함께 잘 꾸려가고 있어요.

'노래'를 다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업이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다음 앨범은 '노래' 음반이 될 것 같아요. 앨범이 만들어져가는 과정도 꾸준히 남기겠습니다.

병원 상황이 몹시 좋지 않다 합니다. 사랑하는 이들 모두 무탈하기를 기원하며, 조금 더 서로를 걱정하고 위로하는 것, 내어줄 수 있는 한 많이 내어주는 것. 그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가을이 더 짙어지는 9월 말, 서울에서 작은 앰비언트 공연을 하게 될 듯 합니다. 자세한 소식 또 전하겠습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모두 평안하시길,

폴 드림.

8/1

보현의 왼쪽 잇몸이 부어있다. 병원에 가려해도 시간이 여의치 않다. 아침 꽤 일찍, 부지현 작가님을 만나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오랜 만에 간 아침 카페는 너무도 시끄러웠고, 우린 밖으로 나와 얘기를 나눴다. 어둠의 시. 어둠에 대한 시. 자장가. 어둠. 빛. 화면조정시간을 잃어버린 시대.

점심을 먹고 최성욱 선생님과 준환이를 맞으러 오두막으로 갔다.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니 하루가 훌쩍 갔다.

'말버릇'을 '중독 vícios'라 표현하는 컨텐츠, 그것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를 얘기하는 컨텐츠를 보았다. 어떤 사람은 말버릇이 현지인이 되어가는 방법이라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막상 현지인이 버려야할 '중독'이라 한다.

어떻게 어둠을 회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어둠을 끌어안을 수 있을까. 더 밝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만의 빛을 피우기 위해.

라트비아의 Gaujar 국립공원이 유럽에서 가장 광해가 적은 곳이라는 뉴스를 본다. Erica synths에 메일을 보내고, 9-10월 무용 공연을 캘린더에 마크하고,

8/2

소음이 사라지면 새들은 더 낮게 노래하지만, 그 노래는 더 복잡해진다는 연구 결과를 보았다.

아침 일찍 밭에 가서 아침을 먹고 약줄 정리하다. 농협에서 스텐리스 니플과 엘보를 사서 관주관 수리를 (결국) 혼자서 했다.

트랩에 하늘소 한 마리가 잡혀있다.

8/3

호숫가와 숲 산책. 저녁엔 묵음 친구들과 저녁을 먹다.

Pearl and the Oysters 노래를 듣다. 노래가 과일맛 풍선껌 같다.

8/4

새벽 2시 보현 기상. 다시 잠들다. 이대로라면 새벽일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입추까지 휴가를 써야하나.

마스터권 계약서를 쓰고, 날인. 동환형과 통화.

중산간을 걷다가 과수원에 들러 트랩 확인하고 돌아오다.

Song#1 리듬을 다시 꺼내다. 송폼 다듬기.

8/5

핀란드 뮤지션 Olli Aarni의 음반을 듣다.

Song#1 리듬 작업. 송폼을 조금 더 간결하게 다듬었다. Snare드럼의 sidestick소리가 맘에 안 든다. 배음이 더 많을 수는 없나.

결국 입추까지 휴가를 쓰기로.

운동. 틈틈히 이런저런 언어 공부, 연습. chatGPT가 유용하긴 하지만 한계도 많다.

계약서 보내다.

8/6

Song#1 리듬 작업. EB-2 로 베이스 라인 만들기. 플랫와운드 줄로 바꿔야겠다. 나일론 기타로 반주해보기.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아내, 보현과 함께 병원 순례. 아내도 이상 없고, 보현의 이빨도 괜찮다 하신다.

트랩에 잡힌 벌레는 없다.

8/7

입추.

땅에서 들려온 소리들.

허님과 의상 얘기를 나누고 오다. 샌들이라니. 샌들을 신어본 지 몇십 년은 된 거 같다. 얘기를 나누는 중에 안테나에서 문자가 왔다.

저녁. 악기와 녹음 장비를 바리바리 싸서 오두막으로 갔다. 오두막 안은 40 도다. 풀밭을 걷기만 해도 어찌 그리 아기 벌레들이 많은지. 방아깨비의 천국이다.

해가 넘어가고, 벌레는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소리'로, 풀벌레들의 심포니를 들으며 풀벌레들을 '보았다'. 귀로 이웃의 존재를 '보는' 놀라운 경험. 녹음 장비를 잔뜩 가져갔지만 엄두가 나지 않아 일단 보류하고, Song#1의 나일론 기타 데모 작업만 하다.

저 멀리 가로등 불 하나가 무척 밝고, 몹시 거슬린다.

서쪽 하늘, 손톱달이 예쁘게 뜬 밤. 창문을 활짝 열고 오두막 바닥에 누워 잠을 청했다.

8/8

혹시라도 오두막 습도가 높아지면 어쩌지, 장비들은 어쩌지, 잠결에도 걱정을 했지만 깨어보니 습도는 60% 아래. 나무집의 힘인 걸까. 잠을 잘 자긴 했지만 역시 집과는 다르다. 아내와 보현이 오두막에 왔고, 같이 아침을 먹고, EM-B 발효를 멈추고, 트랩에 하늘소 두 마리가 잡힌 것을 보고, 내일 작업 계획을 세우고 오다. 수영장에서 걷고 맛있는 점심을 먹고 잠시 졸다가 Karen과 수업을 하고 어제 녹음한 데모를 풀어 확인을 하고, 잠들다.

8/9

새벽 3:10 기상. 어제 작업한 데모 점검. 그리고 과수원 출근.

진입로와 생태화장실까지 손 예초. EM-B 를 옮겨담고 포장 마치고 덩굴 걷고 돌아오다. 칡과 돌동부 덩굴이 '드디어' 등장했다. 쑥쑥덩굴이나 환삼덩굴에 비해 정말 무서운 녀석들.

물 관주. 말통에 담다 남은 EM-B를 약한 나무들에게 나눠주었다. 집에 돌아와 뻗었다.

조빔 송북을 만든 아르투르 네스트로프스키가 진행하는 시리즈. 오랜만에 본 파울라의 모습도 반갑다. 아르투르가 얘기한다. "조빔의 노래는 한 곡 한 곡이, 모두 작곡 교본 같습니다."

수백 번은 들었을 Sábia가, 아 이렇게 아름다웠나. 왜 조빔의 곡은 들으면 들을수록 경탄만 하게 될까.

8/10

윤아씨가 준비한 감자 옹심이 점심 초대를 받은 날. 묵음 친구들, 화정, 윤아씨와 점심을 먹고 오다.

<밤의 오스티나토>를 꺼내보다. 베이스 줄을 라벨라 플랫와운드로 갈았다. 이게 맞다.

8/11

<밤의 오스티나토> rework.

숲에 갔다가 엄청난 소떼를 만났다. 수십 마리는 넘는 소떼가 우리를 향해 다가올 때 처음 느껴본 그 기분. 처음 겪은 그 놀라운 감정.

직박구리가 마당 소나무에 둥지를 튼 것을 오늘에사야 알았다. 이 놀라운 녀석들은 대체 언제 몰래 둥지를 틀었을까. 어미가 포란을 시작했다. 고양이도 올 수 없는 명당 자리에 기가막히게 둥지를 튼 경이로운 존재들. 현명한 새들.

8/12

관주 준비. EM-B 1통. 쑥쑥튼튼 1통. 그런데 모기가...

여러 말로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콜라주하는 것. 천구 같은 불빛을 올려다보며 음악과 말과 불빛과, 불빛 사이의 어둠을 바라보고 몸을 맡기는 것.

8/13

EM-B, 쑥쑥튼튼 1통 씩 관주. 분무기를 돌릴 때 반드시 고무장갑을 낄 것. 전기 조심. 농업용 전기는 380V다.

천구 아래에 누워 <밤의 오스티나토>를 듣는다. 천구에는 총총한 전구가 아주 천천히 점멸한다. 여러 언어로 노래를 부르거나 혹은 낭독을 하는데, 소리가 때론 파편처럼 흩어지기도 하고 흐르기도 한다. 알 수 없는 언어는, 음률 없이 노래가 될 수 있을 지 모른다.

8/14

소포라 회의. <밤의 오스티나토> rework.

아름다움. 따뜻함. 긍정. 기쁨. Laetitia. Conatus.

8/15

distorted world.

10월 7일. 하마스의 폭격으로 부모를 잃은 이스라엘인 Maoz Inon과, 이스라엘 군으로 인해 동생을 잃은 팔레스타인인 Aziz Abu Sarah의 대화.

분노하고 복수하리라 마음을 먹는 순간,

나는 내 동생을 죽인 자의 노예가 된다.

- Aziz Abu Sarah

'강과 바다의 사이'에서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결국 SD3를 샀다.

8/16

SD3로 계속 리듬 짜기 실험.

제주 공연을 하러 온 메리 멤버들을 만나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고 돌아왔다.

진엽님과 1 시간 넘게 통화. 주르칸에에 대한 이야기.

8/17

SD3로 실험. Song#1 MIDI 데이터를 export해서 SD3로 옮기다.

음악의 아름다움이 '고유한' 것이며, 음악에 내재한다는 건 착각이다. 아름다움은 작품이 태어난 맥락은 물론, 작품이 감각되는 맥락에도 있다. 가만, 근데, 아름다움은 정말 '있는' 건가.

번개와 천둥이 드문드문 친 날.

8/18

Francisco López의 Red bull talk을 다시 듣다.

SD3, Al Schmitt가 녹음한 Decades로 리듬 작업.

EU가 2030년까지 20%의 자연을 복원하는 법을 발효했다. EU 국가들은 2030 년까지 훼손된 해양, 육상 생태계 20%를 복원해야하고 2050년까지는 모두 복원해야 한다.

8/19

어머님, 삼촌 내외분 오시다. 급작스러운 태풍 소식. 과수원에 들러 채비를 하고 돌아오다. 트랩에 하늘소 한 마리가 잡혀있다.

8/20

문득. 모든 것이,

문득. 두렵다.

SD3로 패턴 (거의) 완성하다. 드럼을 직접 경험하고 배우는데 한계가 있지만, 그나마 간접 체험이라도 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런데 나는 왜 자꾸 '배우려'하나.

지루한 드럼 소리는 싫은데, 그건 언제나 딜레마다. 리얼 녹음의 '현실'그리고 미디/샘플의 한계, 그 사이의 고민.

오후 3시인데도 바깥이 잠잠하다. 태풍이 몰래 지나가는 걸까.

8/21

식구들은 서울로.

Song#1의 데모를 계속 듣다. 처음 데모가 태어났을 때의 에너지가, 가사가 많아지면서 흐트러졌다. 송폼을 간결하게 바꿔야하고, Flow도 완전히 바꿔야겠다.

가끔 생각한다. 천천히 장고하며 바둑을 두 듯 곡을 쓰는 것이 직관을 거스르는 행위는 아닐까. 나는 답을 알 수 없지만, 지독하고 끈질기게, 마음에 들 때까지 해보는 것. 그것 말고 또 달리 선택지가 없다, 나에겐.

SD3 리듬 수정.

8/22

3:10 기상.

아기새들이 하루가 다르게 커 간다. 제법 큰 벌레를 끊임없이 먹는만큼 몸집이 숙숙 불어나고 있다. 아침엔 비둘기 한 쌍이 비자나무와 소나무 근처를 맴돌다 갔다. 고마운 우리집 소나무는 요람이 되어, 바람이 불 때마다 느릿느릿 둥지를 흔들며 아기들을 재운다.

Song#1 송폼과 가사. 완전히 뜯어고치다. 거의 다 되었다.

8/23

Song#2. 단순해질 때는 단순해지기. 반복을 못 견디는 심성을 억누르고 반복을 견뎌보기. 반복해야 할 때엔 반복할 것. 복잡하게 돌아가지 말기. 상쾌하게, 직진하자.

가사를 거의 완성. 여전히 아주 조금 더... 마음을 건드리는 힘이 부족한 것 같은데, 또 어렵게 가려는 건 아닌지. 아주 아주 심플하게 마무리 짓는 게 맞는 거 아닐까.

허님 부부가 집에 오셔서 점심 대접을 했다.

8/24

Song#2 가사 다시. 송폼 정리. Outro에서 멋을 좀 부려볼까, 하다가 애써 멈춘다.

Song#2 (아마도) 마무리. Song#3 (aka track11)로.

'harken'이라는 영어 동사를 처음 알았다. '마음을 기울여 듣는다'는, (무려) '타동사'다.

The room has its own heartbeat.

Everyone's physiology is different.

8/25

관주 세팅하고 덩굴 걷고 트랩 설치하고 돌아오다. 낮일도 이제 할만하다.

내려놓기 surrender. 그건 아름다움의 결과이자, '능동적'인 행위다.

Song#4 갑툭튀.

Music is ineffable art.

8/26

김동수 작가님의 신간 <오늘의 할 일>을 받았다.

EM-B 한 통 관주. 펌프 테스트. 오랜만에 펌프를 쓰다보니, 토출구와 흡입구까지 헷갈리네. 그리고 덩굴 걷기.

Song#4 거의 완성.

이모부가 돌아가셨다.

8/27

서울행. 겨우 비행기표를 구했다. 아직 휴가철인 걸까.

비행기가 활주로를 뜨기 직전, 새끼 직박구리 한 마리가 소나무 아래 죽어있다는 아내의 문자를 받았다.

장례식장에서 가족들을 만나다. 아주 어릴적 나와 누나는 이모집에 산 적이 있다. 아주 잠시라도 한 솥 밥을 먹은 힘은 정말 얼마나 큰 건지.

비행기를 기다리며 공항 근처에서 책 두 권을 사서 읽었다. 도시의 카페에 앉아 책을 읽는 이 순간이, 소중하면서도 사치스럽게까지 느껴진다.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를 절반 쯤 읽었다. 이 말이 떠오른다.

인간은 종교적 확신을 가질 때 가장 철저하고 즐겁게 악을 행한다.

- 블레즈 파스칼

새벽 3시 반에 시작한 하루가 밤 10 시 넘어 끝났다.

8/28

Song#3 다시 시작. 완전히 다른 개념의 가사로 접근하려하는데, 확률은 반 반이다. 모르겠다.

예전 노래에 Borsta와 Slammer로 비트를 만들어 본다.

밭에 가서 물 1000 L를 받고, 기술센터 미생물 배양실에 가서 예약해둔 유산균, 고초균, 광합성세균을 각각 10 리터씩 받아와 관주해주다. 다시 물 1000 L를 받아 헹굼 flushing 관주.

나무 아래에서 두치를 만났는데 남자친구와 연애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를 본 남자친구는 도망을 가고, 두치는 남자친구가 사라진 쪽을 계속 쳐다보다, 나에게 (처음으로) 하악질을 했다.

8/29

밭으로 가는 길. 제초제를 뒤집어 쓰고 황무지처럼 마른 밭을 보았다. 하늘은 너무도 푸른데, 이 땅은 울고 있다.

책을 읽는 건 잠시 나를 버리는 일. 무언가를 내 안으로 들이는 일 보다 큰 미덕이 아닐까 싶다.

오두막에서 점심을 먹었다. 33 도 정도 되는 기온이 선선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i am that i am. 모세가 들었다는 그 '말씀'을 생각해 본다. 신의 현전을 느끼지 못하기에 기적 속에서만 신을 찾는 자들이 있다는 말을 들으며, EM-B 두 통을 관주하고 700 L 헹굼 관주를 했다.

작은 쌍살벌집을 찾았다. 이 아이들과는 11월 그들이 세상을 뜰 때까지 함께 살 수 있을 것 같다. 나무 '아래'에 집을 지어줘서 고마워. 늦에 지은 집인지 군락이 작다.

칡, 돌동부의 향기로운 덩굴이 나무를 칭칭 감았다. 허리춤까지 풀이 자란 곳에서 온갖 벌레들이 자라나는 소리를 듣다보면, 마치 내가 공존이 어려운 극단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아선 자가 된 것만 같다. 과수원이라는 이 이상한 공간이 조금이라도 덜 이상한 공간이 되게끔 막으려는 자. 인간의 눈에는 무질서한, 자연의 질서. 인간의 원죄로 만든, 인간의 무질서와 자연의 질서 사이에 어정쩡하게 있는 돌보미이자 중재자.

동희가 굴비를 보냈고,

온갖 빛깔의 포도를 어느 농부께서 보내주셨다. 포도 한 알 한 알을 바라보는데, 아름답고, 심지어 거룩하다.

엄마 직박구리가 부엌 창 밖에서 우리를 부른다. 노래일까. 이야기일까. 그저 우는 것일까.

8/30

정말 오랜만에 아내와 단둘이 점심을 먹고, 타카기 마사카츠의 책 원고를 읽다. 누나에게 생일 선물과 편지를 부쳤고,

성하씨가 신보를 보내주었고, 책 추천사를 쓰다 잠들다.

8/31

추천사를 쓰면서 타카기 마사카츠의 음악을 계속 들었다. 평범하게 느껴지던 피아노 소리가 그를 둘러싼 다른 소리와 함께 또다른 '전체성'으로 들려온다. 타카기씨의 이웃이자 80대 할머니 하마짱이 늘 했다는 말. "있으니까." 하마 짱은 아직 살아계실까. 성경에서 말하는 '에흐예'도 '야훼'도 그저 '존재하다'일 뿐.

'있다'. 그게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