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u Close

Category: 해적방송 (page 1 of 8)

5/4-5/28

5/4

온 몸이 젖을 듯 안개 낀 아침을 걸었다.

IFS#3 작업 시작.

세상은 미묘한 랜덤 제네레이터이다. copy and paste는 세상에 원래 없는 것이다.

보현, 아내와 한라 동물병원 선생님을 뵙고 왔다.

한 마디에 노트 둘 혹은 하나. 12분 가량 손으로 하나하나. 나는 반복 없는 루프를 원한다.

5/5

축축한 입하의 아침.

운동장 트랙에 수많은 달팽이들이 다들 부지런히,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간혹 서로 꼭 붙어 있는 달팽이들도 보였다. 모두 느리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기죽지 않고, 앞에 놓인 길을 가고 있었다. 그 끝이 어디이든 상관 없다는 듯 가고 있었다.

Steve Reich의 강의를 그냥 멈춰버렸다.

보현과 나들이를 갔다. 우리는 오래오래 길을 걸었다.

5/6

귤꽃이 왔다. 

가지치기를 하던 중, 쌍살벌 한 마리를 보았다. 노랗고 검은 몸의 벌 한 마리가 귤나무 가지 사이에 엄지 손가락 만한 둥지를 짓고 있다. 벌은 벌집 근처를 떠나지 않고 계속 무언가를 했고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내가 있든 없든 아랑 곳 하지 않고, 벌은 자기의 일에 몰두했다. 끊임없이 하지만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천천히 벌집의 몸을 불리는 듯 했다. 꽤 가까이에서 가지를 치고 있었지만, 나를 공격하지 않아준 것이 고마웠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살 수 있을까.

소방서에 전화를 했다. 119로 신고를 하라고 안내를 해주신다. 내일 전화를 해야겠다.

일본으로 EMS를 보낼 수 없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다.

나무를 전정하는 것과 노래를 믹싱하는 것은 얼마나 비슷한가: 1) 어떤 나무(곡)는 손을 안 대도 충분히 멋지다. 2) 어떤 나무(곡)는 손을 댈수록 이상해진다. 3) 처음엔 난감해도 하다보면 어떻게든 마무리가 된다. 4) 디테일에 빠지면 발란스를 놓친다. 5) 끝나고 나면, 결과를 떠나 스스로가 대견해진다. 6) 그리고 곧 잊는다.

(IFS#3) 루프 그리고 반복에 대한 생각을 종일 하다.

5/7

바람은 거세고, 자잘한 일이 많은 하루다.

벌집을 없애러 119 구조대원 세 분이 오셨다. 여왕벌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엄지 만 한 벌집을 한 분이 똑 떼어낸다. 아직 집이 작아서, 새끼 벌들을 죽이지 않아도 되니 참 다행이라고, 말씀하신다. 쌍살벌은 계속 집을 지을 터이고, 또 벌집이 보이면 지금처럼 크기가 작을 때 신고를 하라고 하신다. 그래야 새끼 벌들이 덜 죽지 않겠냐는, 그 마음이 참 고맙다.

5/1일 만든 유기 칼슘에 패화석을 적게 넣었다는 걸 알았다. (대략) 1 킬로 그램을 더 넣었고 휘휘 저으니 거품이 아직 올라온다.

동력 분무기의 엔진 오일을 바꿨다. 챔버를 여니 짙은 올리브색 폐유가 쏟아진다. 맑은 새 윤활유로 갈고, 실린더에 그리스도 가득 채웠다. 꽃망울은 말 그대로 터질 듯하고, 나는 왜이리 설레는지 모르겠다.

두 군데 우체국에서 모두 거절을 당했다. EMS든 EMS 프리미엄이든, 지금은 교토로 보낼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커다란 소포 상자를 들고 집으로 왔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우체국에 연락을 했다. 오사카를 통해서라면 보내는 것이 가능하다, 는 말씀이다. 1 달은 걸리겠지만요, 라는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IFS #3) 파도 같은 modulation. 하지만 Suzanne Ciani 처럼은 아니고.

5/8

아침부터 각종 지원 사업 서류를 만드느라 바쁘다. 세 가지 지원 사업이 정신 없이 얽히고 설켜있다. 게다가 6 년 동안 써온 유기질 비료의 유기 자재 공시가 보류되었다는 소식을 건네들었다. 도청 직원은 같은 이유로 골분도 쓸 수 없다는데 무슨 이유인 지를 물어봐도, 자세한 내용을 잘 모르는 눈치다.

바삐 다른 비료를 찾았다. N-P-K 비율과 가격을 비교하고, 전화를 걸어서 견적을 받고, 지원금에 맞춰서 포대 수를 계산하고, 또 어떤 사업은 도 내 업체에서 생산되는 비료에만 적용된다는 말에 또 다른 업체를 알아보고, 그러다보니 시간이 다 지나가버렸다.

5/9

비가 오는 하루. 남편 제비가 둥지 아래 꺽쇠에서 꾸벅꾸벅 존다. 머지 않아 새끼새가 태어날 지도 모르겠다.

(IFS#3)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센서를 고쳐서 화분에 꽂아보았다. 신호가 온다. 이 미약한 신호를 control voltage로 바꾸어 소리를 모듈레이션 했다.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 흙일까. 수분일까. 미생물일까. 유기물일까.

5/10

반 나절을 나무들과 보냈다.

나무들이 나를 달래주었다.

바람이 보리를 쓸어주듯,

장다리 꽃이 함께 흔들려주었다.

마음이 황량해져도, 황량한 노래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

(IFS #3) Formant filter + Clouds. Real-time recording & bounce.

5/11

이수지 님의 소포가 도착했다. 나를 위해 일부러 한 부를 더 만들었다는 작업 일지를, 우두커니 선 채로 다 읽어버렸다.

(...)

무엇이 나오기도 전에 형식의 정합성을 먼저 생각하는 버릇, 어쩔 수 없다. 내 안에서 아귀가 맞아야 시작할 수 있으니.

(...)

용기가 났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구나.

과수원 학교에서 놀라운 소식을 보았다. 몇 년 전 다른 나무에 깔려 죽었다 생각했던 배나무가 다시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어낸 것이다. 옆에 있는 형제 나무가 끊임없이 뿌리로 돌봐준 덕분일 지도 모른다.

아내는 되살아날 소 蘇 자를 이야기 해주었다.

7년을 같이 지낸 장독대와, 굳은 시멘트 두 덩이와 끝내 이별을 했다.

문득 잊고 있던 화분에 흠뻑 물을 주었다.

나는, 배나무처럼, 귤나무처럼, 혹은 제비나 달팽이처럼 살면 되겠다, 생각을 하였다.

5/12

방제 #3-1. 기계유제 5L + 보르도칼 2 봉 in 1000L.

귤 꽃은 10% 정도 왔나.

기계 유유제를 샀다가 공시가 안 된 제품임을 알고 반품을 했다. 농협 직원은, '친환경'이라는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신다. 성분이 똑 같아도 공시가 안 되면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친환경 농정은, 생각보다 까다롭고 또 이상하다.

비둘기가 다시 소나무로 돌아 왔다. 비둘기 한 마리가 옆집 옥상에서 물끄러미 소나무를 내려다 보더니 휘릭, 나무 속에 들어와 꼼짝 않고 앉아있다. 알을 품는 걸까. 비둘기는 암수가 번갈아 알을 품는다는데, 한 마리 밖에 보이지 않는다.

(IFS#3) LOOP의 멜로디에서 where is my friend? Where is my friend?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layering 할 때, 결코 예측할 수 없는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5/13

방제 #3-2. 기계유제 5L + 보르도칼 2 봉 in 1000L.

너무나 좋은 타이밍에 방제를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기쁘다.

되살아날 소蘇, 는 '발효'를 말하는 건 아닐까. 풀'艸'아래 묻어놓은 물고기'魚'와 곡식'禾'을 떠올리니, 후나즈시와 가자미 식해가 생각났다.

미생물은 세상을 정리해서, 되돌려준다.

⟪물이 되는 꿈⟫이 집에 왔다. 조촐한 축하를 했다. 보현이 와인을 한 병 사주었다. 고마워.

5/14

비 예보가 사라진 날. 순이 많이 올라왔다. 레몬 꽃망울이 하나, 둘, 톡톡 터지고 있다.

비둘기는 다시는 알을 떠나 보내지 않겠다 각오라도 한 듯, 꼼짝 없이 한 자리에서 알을 품고 있다. 먹지도 않는 것 같다. 바다를 보다, 산을 보다,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며 한 자리에 머물러 있다. 유난히 가늘고 예쁜 목선을 보니, 사 년 전, 우리집에 왔던 페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페이도 우리집 소나무에 앉아 쉬는 걸 좋아했었지.

아이와 산책을 하고, 오두막에 가서 기계를 부치고, 집에 돌아와서 이수지님의 강연을 들었다.

5/15

비가 온다. 비둘기는 여전히 꼼짝도 않는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근처 곳곳에 먹을 것을 뿌려놓았지만 본 척도 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저녁이 되자 아내는 기쁜 소식이 있다며, 아무래도 비둘기가 짝과 교대를 하기는 하는 것 같다는 말을 해주었다. 처음 들어본 듯한 낮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다른 한 마리가 옥상 위에서 내려와 서로 자리를 바꾸더라는 것이다. 나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필드 레코딩한 소리들을 정리했다. 작년 7월 새벽 5시의 빗소리가 너무나 장쾌하게 담겼다.

(IFS #3) 손으로 모듈레이션을 해보았지만, 별로다. 맘에 들지 않아.

5/16

안개가 자욱한 아침, 비가 흩뿌린다. 

도착한 기계가 불량이라 돌려보내야겠다.

푸른 주차장에, 붉은 담팔수 잎이 떨어져있었다.

5/17

꽃은 60-70% 가량 왔다. 올해 처음 뻐꾸기 소리를 들었다. 레몬꽃이 여왕님처럼 활짝 피어났다. 다섯 꽃잎도 있고, 일곱 꽃잎도 있다. 아름답구나. 아름답구나.

봄순이 많이 굳었는데, 그럭저럭 순을 지켜낸 것도 같다. 오두막에 다시 컴퓨터와 악기를 갖다 놓았다. 어쩌다보니 지금부터는 집과 오두막, 두 군데에 실험실을 꾸리게 되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상순이 오두막에 놀러 왔다. 서너 시간 동안 음악 얘기만 하다가 돌솥밥을 같이 먹고 헤어졌다.

5/18

조성진 씨의 새 음반을 듣다. 베르그의 곡에서 반복적인 음률의 어센딩과 디센딩을 들으니, 마치 로패스 필터로 무브먼트를 준 것처럼 들린다.

책을 여기저기 보내었다.


레몬꽃이 한가득 피어났다.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어쩔 줄을 모르겠다.

(IFS#3) 템포를 73에서 65로 낮추었다. 그러니 마디 사이의 간격이 넓어지고 숨쉴 공간이 더 생긴 것 같다. 패치의 attack 값을 올렸다. 필터 무브먼트 없이 바운스를 하는데, 충분하다. 미디 노트를 에디팅 하려다가, 말았다. 모자라면 모자란대로, 간다.

5/19

90% 넘게 온 꽃들이 엇갈리듯 피고 진다.

가지를 치는 중에, 또 쌍살벌이 보였다. 저번과 비슷한 패턴이다. 어쩌면 같은 벌일 지도 몰라.

다시 119에서 네 분의 대원들이 오셨다.

미안하다.

앞 밭의 옥수수들이 무럭무럭 커간다.

비둘기와 제비가 나란히 알을 품는 봄. 앵두가 제법 익었다. 하나 먹어보니, 맛이 꽤 들었다.

다 쓴 약 통을 개조해서 DIY로 수중 청음기 hydrophone를 만들다. 캔 안 쪽에 컨택트 마이크로 폰을 붙이고, 구멍을 내서 선을 빼고, 밀납으로 구멍을 메웠다. 만들면서 계속 웃음이 났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5/20

소만. 병원에 다녀왔다.

(IFS#3) 20년 된 조믹 프리앰프에 Rhodes를 연결해서 루프를 녹음. <timbre> vs. <motion & movement>에 대한 생각과 고민.

5/21

보현과 바닷가로 산책을 갔다. 나는 샌드위치를 먹었고 아이는 간식을 먹었다. 푸른 바다와 하늘이 있는, 여기가 천국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엉터리 hydrophone에 테플론 테이프를 감아서 방수처리를 하였다. 곧 테스트를 해야지.

5/22

제비 주니어가 태어났다. 

하이드로폰 테스트 실패. 가벼워서 물 위에 둥둥 떠올랐다. 돌아오는 길에 철물점에 들러 묵직한 자석 추를 사왔다. 다시 개조를.

그러나 오늘도 바다는 아름다웠다. 말할 수 없이.

5/23

잿빛 곰팡이 방제 #1-1. 아미노 액비 2L + 키토 목초액 5L + EM-B 5L in 1000 L.

꽃은 90% 이상 졌고, 방제 타이밍이 너무나 좋다. 날이 많이 더워져서 금세 고글 안에 습기가 찬다. 뿌연 안경과 고글 너머로 보일 듯 말 듯한 여린 새순에 듬뿍 듬뿍 영양제를 뿌려주었다. 아직은 오전 방제도 그럭저럭 할 수 있다.

이제 과수원에도 두견이 소리가 들린다. 뻐꾸기 한 마리가 높은 전봇대 위에서 새끼들에게 목소리를 전한다. 쌍안경을 들자 내와 시선이 마주친 새가, 곧 입을 다물고 만다.

5/24

잿빛 곰팡이 방제 #1-2. 아미노 액비 2L + 키토 목초액 5L + EM-B 5L in 1000 L.

날이 조금 흐려서 약을 치기는 더 좋다. 액비가 많이 남아서 허약한 나무들에게 듬뿍 듬뿍 뿌려주었다. 선물로 줄 약도 한 말통 '포장' 하고, 집에 뿌릴 것도 따로 담았다. 마음이 풍성하다.

꽃은 거의 다 지고, 콩알 만한 아기 귤이 주렁주렁 달렸다.

부모 제비들이 갓 태어난 새끼들에게 끊임없이 목소리를 들려준다. 현관에 제비의 가슴털이 한 올 한 올 떨어져있다. 아기들을 덮어주려는 건가.

뜻밖의 improvization으로 IFS#4 를 만들었다.

5/25

안개가 짙은 날.

왠지 연락이 잦은 하루다. 지영이네가 소식을 전했고, 동하와 통화를 했고, 상순과 연락을 주고 받았다. 저녁에는 배대표님과 손님들을 만났다. 모든 소식이 반갑고 감사하다.

이제 밤에도 부모 제비가 둥지에 머물며 잠을 잔다.

(IFS#4) modular filter와 magneto로 곡을 손질했다. 그런데 손을 대면 댈 수록 이상해질 것만 같다.

5/26

실비가 내리는 아침. 그러다 예상 못한 소나기가 내렸고, 촘촘히 짜둔 하루 계획이 다 소용없게 되었다.

서울 부모님이 오시기 전 날. 마당의 솔잎을 쓸어내고, 현관 청소를 하고, 집 안팎을 (적당히) 치웠다. hydrophone을 고쳤다. 물 속 소리를 녹음하러 바다로 갔지만 물 때를 놓쳐버렸다. 돌아와서, 치자 나무에 액비를 엽면 시비 해주었다.

성택씨에게 세미나용 사진을 보내주었다. 폴더에서 사진을 하나하나 찾으며 기억을 더듬다 보니, 오두막을 만들 던 순간들이 아련하고 그립다.

5/27

보현이 혈뇨를 눠서 급히 병원으로 갔다. 염증이 있는 것 같아 약을 받아왔다. 무척 쓴 약이라는 데 어떻게 먹여야 하나.

서울에서 부모님이 오셨다. 동네 식당에서 물회를 먹고, 어머님은 앵두를 따셨고 아버님은 휴식을 취하셨다. 누긋하게 쉬다가 삼나무 숲을 함께 걷고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

일렉 기타와 페달로 작업을 시작한다.

5/28

하나님께서 메리 올리버의 ⟪Dog Songs⟫ 가 계약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문득 작년 이맘 때 꾸었던 꿈이 생각난다.

며칠 전 꿈 속에서 난 뜬금 없이 메리 올리버의 고향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취리히 클로텐 공항의 검은 이정표가 멀리 보이고, 어서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타야하는데 생각했지만, 정작 '어디'로 가야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였더라. 어디로 가야 되더라. 시카고였나. 아니, 메사츄세츠였나. 표에는 분명히 목적지가 적혀있는데 눈을 크게 뜨고 글자를 읽어보려하면 할수록 목적지가 보이지 않았다. 종착지의 이름이 끊임없이 변해가는 탑승권을 들고 어질어질한 기분으로 공항을 헤메다 잠이 깼다.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지. 갈 수는 있는 건지. 덜 깬 잠기운으로 산책을 하는데, 채 번지지 않은 잔디 떼 사이에서 처음 만난 누가 웃으며 인사를 한다.

from instagram @institute.for.silence, 2019-05-09

물이 되는 꿈 – 루시드폴 노래하고 이수지 그리다

요즘 나는 물 속을 자주 걷는다. 아줄레주 같은 물 속을 걸으면, 가장 느리게 몸이 움직인다. 물빛으로 손을 뻗으며 생각을 한다. 꿈을 꾸기도 한다. 물결도 물빛도 조금도 똑같지 않구나. 그런 음악을 만들 수 있을까. 그러다보면 시간은 금세 지나간다. 몸이 느려진만큼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걸까. 그런데, 그런 ‘맹물 같은’ 음악을 들어줄 사람이 있을까.

⟪강이⟫의 첫 장을 펼친 새벽. 보현과의 앨범을 구상하며 지내던 어느 겨울이었다. 검은 개 강이의 이야기를 ‘읽고’ 마지막 책장을 덮던 그 순간의 침묵이, 아직도 가끔 떠오를 때가 있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커다란 아름다움이, 무언가를 정화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비로소 해가 뜰 때까지 머릿속에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보답으로 ⟨검은 개⟩가 수록된 앨범을 보내드렸다. 그러고 보니 앨범에는 ⟨강⟩이란 노래도 있다.

작업 일지를 보다가, ‘정합성’이란 표현에 쿵, 마음이 내리앉는다. 수많은 블루 중에 헬리오 터쿠아즈를 고른 건 ‘그냥 이유 없이 끌려서’라지만, 분명 ‘필연’이었을 거다. 첫 장을 펼친다. 물가에 앉아있는 아이의 등 뒤에 있는 휠체어. 제목 아래로 왜 바다 사자 한 마리가 그려져 있을까. 산은 어째서 이렇게 순둥순둥한 모양새인지. 작업 일지를 읽노라니 모두 남김 없이 마음에 스며들었다.

실물이 훨씬 아름답구나. 믿을 수 없을 만큼.

한 장면을 펼친다.


온갖 무늬의 파문 속을, 사람도 나비도 바다표범도 다 함께 유영한다. 물도 공기도 아닌, 분별 없는 공간 속에 모두가 함께 있다. 그 하나하나가 또렷이 ‘들린다.’ 똑같은 파도가 없고 똑같은 바람이 없듯, 똑같은 듯 결코 똑같지 않은 음들이 번져가는 음악. 그런 물빛의 음악을 나도 꿈꾸고 있었던 거구나.

할 수 있을 것 같다.

용기가 생겼다.

4/22-5/3

4/22

나는 과수원을 학교라 부른다. 오늘 나는 오후반 수업을 갔다. 선생님은 없는, 학교다.

덩치 큰 나무 한 그루, 잎 속 그늘진 곳에 깍지 벌레들이 많다. 크게 자란만큼 잎은 무성하고 짙푸르다. 벌레는 연약한 나무 못지 않게 덩치만 크게 웃자란 나무도 좋아한다. 사람과 똑같다.

우리는 나무의 주지를 함부러 자르지 않으려 한다. 될 수만 있다면 강전정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일 년 동안 자란 순만 부지런히 자르고 잘 자란 순은 지켜주며 수형을 유지하겠다는 마음이다.

100 명의 농부가 있다면, 100 가지 방식으로 전정을 할 것이다.

일본에서 테잎 레코더가 왔다.

제비들이 마을로 몰려든다. 구름이 아름다운 날. 보현과 걷고 또 걸었다.

4/23

방제 #2-1:  1000 L 보르도칼 두 봉지 + 기계유 유제 5 L.

벚나무 길목을 돌아 과수원으로 들어서는데, 문득 어쩌면 이 일이 나의 천직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7년 만의 일이다.

보현이 첫 저작권료를 받은 날, 첫 수확한 표고 버섯으로 함께 축하를 했다.

레코더의 트랙 하나가 고장인 것을 알았다. 생각난 김에 황 사장님께 전화를 했는데, 릴데크 수리는 아직 멀었단다. 오래된 장비는 늘 골치다.

4/24

잘 자란 담팔수 한 그루를 보았다. 상처가 없어 아름답게 큰 나무를 보면, 깊은 어딘가가 아프다.

무슨 사연인지 깨진 꿩알이 산책길에 많이 보인다.

올해를 넘길 수 있을까 싶은 나무가 과수원에 몇 그루 있다. 그런 나무를 위해 액비를 관주해주었다. 650 L 정도의 물에 작년에 만든 액비 한 말과 아미노 액비 5 L를 넣어 동력 분무기로 뿌렸다.

수 백 그루의 나무 중에는, 무척 약하고 여린 나무도 있고 하늘 높은 줄 모르게 가지를 뻗는, 수세가 강한 나무도 있다. 연약한 나무는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죽지만, 강한 나무는 일 년만 지나도 엄청나게 순이 자라서, 한 시간이 넘게 가지를 쳐내야 한다.

6 년 동안 대략 세 그루의 나무가 죽었고, 올 봄 한 그루가 더 죽었다. 나는 나무를 살린 적도 있지만 살리지 못한 경우도 많다. 나무도 삶의 열쇠는 스스로에게 있다.

4/25

약하디 약한 나무의 꽃눈을 따주었다. 따도 따도 꽃눈이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한 그루의 나무가 삶을 마감할 때, 유난히 많은 꽃을 틔우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어제만해도 나는, 이 나무가 곧 죽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바싹 마른 가지에 두 손을 갖다 대었는데 손끝이 따뜻했다. 그건 아마도 빌레 위로 내리쬔 햇살 때문이었겠지만. 그 순간, 어쩌면 너를 살릴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나무는 햇살을 가려주고, 나는 나무를 죄는 덩굴을 끊어준다. 각자의 힘으로 서로를 돌보는 것.

내일 방제를 할 때 약해를 입지 않게 표고목에 천막을 씌워주웠다.

담벼락 위로 짝을 찾은 제비들이 정신없이 활공을 한다.

4/26

영락없는 봄 날. 제비가 집 현관 앞에 입주를 했다. 아침부터 재잘대며 소리를 지른다. 반갑게 돌아온 4월의 소리다.

제비들은 곧바로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했다. 진흙을 물어와 둥지의 담을 더 높게 쌓고, 그 안에 뭔가를 열심히 깔아두는 듯 싶다. 5 마리 새끼를 키우기엔 이 둥지는 작은 편이라, 재작년 여름엔 날개가 약한 새끼 한 마리가 마당으로 떨어진 적도 있었다. 어, 그런데 암제비의 날개 한 쪽이 이상하다. 검은 깃 사이로 언뜻언뜻 유난히 흰 잔털이 많다. 혹시 그 아이가 돌아온 건가.

보르도액/기계유유제 방제 #2-2: recipe는 #2-1과 동일.

나무 한 그루는 개별자가 아닌, 하나의 사회 같다.

4/27

Peak + BSP: 만든 패치로 라이브 연습을 하다.

삼각지의 나무들을 전정했다. 아무리 덩치가 산만해도, 차근차근 다듬다보면 거짓말처럼 작년 이 맘때 모습이 된다.

밭담 너머에서 남자 아이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공놀이를 하다가 공이 넘어갔어요. 응, 그래? 삼촌이 꺼내줄까? 앞니가 빠진 여자 아이가 오더니, 무서운 아저씨 같았는데, 하더니 사라진다. 남자 아이는, 어딘가로 갔다가 쪼로로 와서는, 이게 귤밭이에요? 응, 귵밭이지. 다시 멀리 사라진다.

느즈막이 목욕을 하고 돌아오는 길, 눈부시게 아름다운 노을을 보았다.

4/28

나는 마당일을 하고, 제비 부부는 열심히 둥지 보수를 한다.

당연해 보이는 것도, 실은 모두 경이롭다.

토양 검정 결과를 받았다. pH가 높아져 거의 중성에 가까워졌고, 유효 인산과 칼륨 이온이 많아졌다. 작년 감귤이 유난히 맛있었던 이유가 있구나. 올해엔 패화석을 뿌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감귤 나무는 긴 시간에 걸쳐 결국 사람의 반려 식물이 된 게 아닐까 싶다. 반려견이 야생에서 모두 살 수 없고 인간이 야생에서 살아 남기 어렵게 되었듯, 내버려 두면 어쩔 수 없이 위험해진다.

'땅을 만든다'는 건, 순환이 시작될 때까지 버틸 수 있도록 저금을 하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보리밭이 아름다워 차를 세웠다.

4/29

보현과 아내와 내가 처음 만난 날.

제비가 알을 품었다.

보호소에 가서 먹을 것을 전해주고 아이들과 실컷 놀았다. 나는 강아지들과 하루 종일도 놀 수 있다.

소나무 둥치에 뭔가 반짝, 하는 것이 있어 가보니, 눈물 같은 송진 방울이 달빛에 빛나고 있었다.

4/30

돈나무의 꽃을 따주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오랜만에 찾은 오름길을 오래오래 보현과 걸었다.

5/1

어김 없이 오월의 첫 날, 레몬꽃이 왔다.

브라이언 이노는, 공감 능력(empathy)이란 능동적 상상력 (active imagination)으로 스스로를 훈련해야 하는 일인데, 그것이 곧 우리가 예술을 필요로 하는 이유라고 했다.

정진씨와 친구들이 밭에 와서 놀다 갔다. 함께 온 친구는, 지금은 타운하우스가 들어 선 근처 마을은 원래 거대한 곶자왈이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지금 이 과수원을 둘러싼 타운하우스들도 수 천 그루의 나무가 베어지고 태워진 땅 위에 지어진 것이다. 지난 설날, 옆 집 형님은 우리집이 있는 이 동네가 원래 바다였다고 말해 주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집도 언젠가는 바다직박구리나 숭어 혹은 게나 갯강구의 집이었을 것이다.

Federico Durand의 새 앨범을 너무나 기다렸다.

5/2

음반은 뮤지션의 맥박인가.

5/3

한 때는 매일 걷던 길을 몇 년 만에 보현과 함께 걸었다. 이 시골길에도 커피숍이 생기고 게스트하우스도 생기고, 고깃집도 생겼다. 절간 대문은 낯설게 바뀌었다. 그 앞으로 또 무엇이 들어설까 싶은 거대한 건물이 올라가고 있다. 그늘진 바닷가에는 사람들이 돌을 쌓아 올려 작은 탑을 만들어 두었다. 하나같이 무너질 듯 보여도, 어느 하나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도 같다. 하늘거리던 억새가 있던 자리엔 갯무의 떡잎이 듬성듬성 돋아나있다. 도요새와 제비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양어장 근처에 새로 지은 집은 벌써 부식되어가고, 집집마다 차는 있지만 아무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 옆으로 멋지게 심은 나무는 가엾게 말라가고 있었다. 물떼새가 보인다. 구름 다리가 생겼고, 일 분만에 옆 동네로 갈 수가 있게 되었다. 이 많은 것들이 생기고 바뀌는 동안, 우리는 한 번도 이 길을 걷지 않았다.

4/1-4/21

4/1

4월. 거짓말처럼 제비가 왔다. 우리집 소나무에서 멧비둘기가 알을 품고 있다. 보일러가 고장이 났다. 보일러 없이 지내기엔 아직 추운 날이다.

4/2

보일러 공사가 마무리 되지 않았다. 집을 비워야할 즈음 기사님이 오신다기에 대문을 열어두고 집을 나섰다. 문을 열어두고 나갈 수 있는 동네에 산다는 게 여전히 신기하다.

해가 나면 따뜻하고, 해가 사라지면 금세 공기가 식는다. 바람골이 지나는 과수원은 아직 겨울이다. 그래도 땅은 이미 봄이다. 나무 아래로 온갖 덩굴 손이 하늘을 향하며 무엇이라도 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묵은 덩굴을 걷어내는 게 가지치기의 반이다. 천 평의 친환경 농사는 3 천평의 관행 농사 만큼 품이 드는 것 같다.

무성해진 귤나무에 새들이 떠난 빈 둥지가 많이 있다. 깍지벌레가 모이기 시작하고, 칠성무당벌레도 드문드문 보인다. 레몬 꽃눈이 탱글탱글하다. 레몬 꽃이 귤꽃보다 먼저 오겠다. 올해에는 더 많은 레몬이 열릴 것이다. 아내가 바싹 마른 뱀 허물을 보여주었다. 모든 것이 어김 없이 찾아오고 물러간다.

밭 입구에 핀 유채꽃이 시들시들하다. 누군가 제초제를 뿌리고 갔나보다. 꽃에 까지 제초제를 뿌리는 마음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알을 품던 비둘기가 보이지 않는다. 옥상에서 내려다 보니, 둥지에 알도 없다. 보일러 수리를 마친 기사님이 문을 훤히 열어두고 가셨다.

4/3

2 년 전 오늘, 먼지 한 톨 없이 맑았건 하늘이 생각나. 파란 하늘에 둥둥 떠있던 분홍빛 꽃은 잔뜩 물이 올라있었지. 물결처럼 사람들이 밀려들던, 공원 아닌 공원에서 노래를 부르고 둘러둘러 산길을 내려오던 2 년 전 그 날.

free tempo 데모를 다 지우고, 다시 in time으로 녹음을 했다.

낮에는 반팔에 바람막이 하나만 입고 일을 해도 충분히 따뜻하다. 좁쌀만한 꽃눈이 보인다. 꽃눈을 보며 하는 늦깎이 전정. 휘파람새가, 멧새가, 동박새가 노래를 부른다.

집에 돌아오자 아내가 나를 소나무 아래로 데리고 갔다. 갈색 솔잎 더미 위에 비둘기 알 하나가 부서진 채 있다. 엄지보다 작고 하얗다. 어미의 솜털 하나가 껍질 위에 붙은 채 바람에 떨고 있었다.

앵두나무 아래에 알을 묻어주었다. 서쪽 바다 위에 별무리 진 별 하나가 떠있다.

4/4

아침 일찍 아내의 시를 읽었다.

유채꽃 한 송이가 마당 구석에 피어났다. 어디에서 왔을까.

몸이 좋지 않아 일을 쉬었다.

팬이 건네준 구근에서 하나둘 꽃이 핀다.

봄눈이 흐드러진 한 낮. 보현과 걸었다. 보현의 코 끝에 꽃잎이 내리앉았다. 아내의 복통이 심해 걱정을 많이 하였다. 밤 목욕을 하고 돌아왔다.

4/5

복수초가 핀 숲 속에는 별꽃도 금강 제비꽃도 피었다.

아무도 없는 어느 동산을 걷다. 철저히 계획대로 심겨진 나무와 풀과 연못과 억새와,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인위적이라 오히려 너무나 자연스러운 동산. 철제 빔으로 뼈대를 짠 작은 건물의 판재와 판재 사이로 온갖 소리가 스며들었다. 억새가 몸을 부비는 소리. 바람이 땅을 훑는 소리. 소리의 체를 지나 걸러진 신기한 사운드 스케이프를 녹음기에 담아왔다.

바람이 찬 날이다. 소주를 마셨다.

4/6

⟪물이 되는 꿈⟫의 가제본이 왔다.

가지치기를 할 때, 나는 나무 주 변을 빙빙 돈다. 옆 나무도 살펴야 한다. 나무 한 그루의 꼴과 주변 나무와의 균형을 살피며 조금씩, 천천히 자르고 다듬는다. 살릴 가지와 잘라낼 가지를 정해야 하고 어느 지점에서 잘라야 할 지를 정해야 한다. 솎아낼 순을 정해야 한다. 모든 순간, 선택해야 한다.

꽃눈 주렁주렁한 순은 얼마나 예쁜지. 하나같이 기특하고 아깝다. 모두 키우고 싶지만, 안 된다. 그런 내 욕심부터 잘라내버려야 한다.

여름 순이 건강해. 귀한 순들을 잘 지켜냈어.

남해에 보낼 액자에 사인을 했다. 저녁에는 경호를 만나 스시를 먹었다. 10 년의 인연이 감사하다.

4/7

바실러스 액비 발효를 시작했다. 물 200 L에 미생물 원액 (작은 것) 2 통, 집에서 갈아온 청국장 800 gr을 넣고, 당밀 한 통을 넣는다. 잘 저어서 40 도로 은근히 끓이며 열흘 간 발효시키면 향긋한 액비가 된다. 당밀은 미생물의 먹이가 될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영양 덩어리이다. 특히 마그네슘이나 철분 같은 미네랄이 많다.

맛있게 잘 익어서 땅과 나무를 행복하게 해 주거라.

432 Hz로 튜닝할 수 있는 튜너가 도착하였다. 밀린 우편물을 보냈다. 커다란 보름달이 하늘에 떴다. 소원은 빌면 빌수록 가짓수가 늘어난다. 아차 싶어 모두 잘라내고 하나만 빌었다.

세잎 클로버의 이름은 '일상'. 네잎 클로버의 이름은 '행운'. 다섯잎 클로버는, '운명'.

4/8

여전히 시린 날이다. 밭에서는 바람 막이 안에 스웨터를 덧대 입어야 한다. 천천히. 천천히. 일을 한다. 천천히. 할 수 밖에 없다.

새벽녘 아주 잠시만 작업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일상의 모든 것이 느려졌다.

물 속에서 30 분을 걸었다. 물 밖으로 몸을 끄집어 내는 것이 아직 버겁다.

4/9

물빛 같은 음악을 만들고 싶다. 너무나 물과 같아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아도.

나는 더 용감한 사람이 되고 싶다.

마음에 닿는 것도, 닿지 못하는 것도 운명이다. 쓸쓸해져도 수긍해야 하는 것들이 세상엔 많이 있다.

풀잠자리가 날아왔다.

누군가 짓다만 둥지가 있었다. 이 나무는 손대지 않는 게 좋겠다 싶어 한 발 물러났다.

4/10

태어나서 처음으로 새를 죽였다.

4/11

나는 왜 하필 그 길로 갔을까. 나는 왜 하필 그 속도로 트럭을 몰았을까. 너는 왜 하필 그 시간, 그곳으로 날아들었을까. 우리는 왜 넓고 넓은 세상 한 가운데에 살다가, 하필 그 곳 그 한 점에서 부딪혔을까.

이삭처럼 늘어지던 네 목.

작약 아래 땅을 파서 동박새의 머리를 서쪽으로 뉘이고, 흙을 덮었다. 비자 나무 아래에 핀 프리지아와 갓꽃 한 송이를 꺾어와 기도를 했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마당의 호제비꽃은 어디서 왔을까.

장대 비가 쏟아진다. 키가 훌쩍 큰 튜울립이 스러졌다. 아무리 북돋아줘도 스러질만큼 키가 커버렸다. 마도요 한 쌍이 집 앞 바다로 왔다. 선휴씨를 만나서 점심을 먹었다.

4/12

앵두가 초록빛으로 여물었다. 빠르구나.

산간에는 대설경보가 내려졌다.

4/13

첫 방제를 했다. 1000 L에 보르도칼 두 봉지를 섞었다. 기계유유제 없이 보르도액 방제만 한다. 두번에 나눠하기로 한다.

작년에 비한다면 더뎅이병 흔적이 많지 않아 다행이다. 흡입 호스에 구멍이 나서 테플론 테잎을 임시로 감고 작업을 했다. 날이 춥고 강풍이 부는 날이다. 무리하지 않고, 사고 없이 할 수 있기를 기도했고, 거짓말처럼 바람이 잦아들었다. 사전 투표를 하였다.

4/14

두 번 째 방제. 어제보다 기온이 5-6 도 높고 바람이 약하다. 약 치기 좋은 날이다.

보현과 한 번도 함께 가보지 못한 곳으로 저녁 산책을 갔다.

4/15

기쁨과 슬픔이 함께 한 날.

4/16

노래를 마치고 꾸벅 인사를 해도 박수 소리 하나 없던 무대. 빠짐없이 마스크를 쓰고 있어 누가 누군지, 무슨 표정인 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던 성긴 객석. 사람들은 2 미터 넘게 띄엄띄엄 놓인 의자에 앉아 부동 자세로 노래를 들어주었고,

햇살이 따가운 날이다. 지판을 짚은 손가락을 보며 노래를 부르는데, 덥지도 차지도 않은 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와 기타 헤드에 달린 노란 리본이 나풀거렸다. 나는 꿈을 꾸듯 노래를 불렀다.

4/17

비가 오다.

액비 발효 끝. 전원을 내리고 수리한 흡입 호스를 창고에 두고 돌아왔다. 찔레 덩굴을 다듬었고 벽에 유인선을 달아주었다. 작약 꽃이 피었다. 첫 꽃 송이를 동박새에게 보냈다.

효진씨가 소식을 전해왔다. 평안히 잘 지낸다는 말에 무엇보다 안도했다.

4/18

아내는 액비를 통에 담고, 나는 집안 일을 하였다. 제비들이 혹시라도 낯설어 할까봐 둥지 아래 받쳐둔 나무 판을 빼주었다.

4/19

라이브와 촬영, 회의아닌 회의를 하다 보니 새벽 3시가 넘어버렸다. 꼬박 하루를 깨어있다.

4/20

쉬지 못하면 너무 아프다.

내 몸은 내가 아니므로, 나는 내 몸을 돌봐야 한다.

4/21

샘의 OP-1을 빌려왔다. 악기 하나를 배우는 건, 언어 하나를 배우는 것과 같다.

소리를 쌓아 음악을 만드는 법. 혹은 소리를 깎아 음악을 만드는 법이 있다. 모든 음악은 어차피, 침묵과 소음의 사이, 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왠지 모르게 위안을 받는다.

올해의 마지막 날, 이곳에는 첫눈이 내렸습니다.



오늘 아침, 제가 사는 동네에도 첫눈이 내렸습니다.

산책길에 만난 눈발이 너무도 반가워

텅 빈 운동장을 보현과 신나게 뛰었습니다.

앨범이 나온 지 보름 즈음 지났을 뿐인데

두어 달은 훌쩍 간 듯이 아득합니다.

'너와 나'와 함께 해준 모든 분들께

올해의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폴 드림.



2019 눈 오는 날의 동화 set-list

  1. 눈 오는 날의 동화 (#9)
  2. 안녕 (#8)
  3. 길 위 (#9)
  4. 물이 되는 꿈 (#2)
  5. 국경의 밤 (#3)
  6. 바람, 어디에서 부는 지 (#3)
  7. 아직, 있다. (#7)
  8. 읽을 수 없는 책 (#9)
  9. 스며들었네 (#7)
  10. 바다처럼 그렇게 (#8)
  11. 불안의 밤 (#9)
  12. 불 (#5)
  13. 은하철도의 밤 (#8)
  14. 뚜벅뚜벅 탐험대 (#9)
  15. 걸어가자 (#4)
  16. 어부가 (#5)

encore

  1. 사람이었네 (#3)
  2. 고등어 (#4)

BGM

너와 나 (extended version, unreleased demo)

‘너와 나’를 만났습니다.

드디어 오늘 '너와 나'를 만났습니다.

사진으로, 원고로, 교정지로

함께 보낸 숱한 시간이

어엿하고 아름다운 한 권의 책이 되어주었습니다.



초롱 불빛이 되어.

긴 길을 밝혀주신

편집자이자 공동 프로듀서 이하나님,

디자이너 님과 미디어 창비의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이 책을 태어나게 했던,

그러나 곧 멀리 떠나간,

Mary Oliver. 감사합니다.

한 몸이 되어 음반을 잉태해준

희열형과 안테나의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벌써 절반이 넘는 디스코그래피를 함께 해준,

저의 동반자, 마에스트로 윤성씨,

여느 때처럼 모든 노래의 든든한 뿌리가 되어 준 호규,

그만 할 수 있는 에너지와 무브먼트로 노래의 틀을 만들어 준 동진,

수 많은 빈티지 기타를 다 가지고 와서 하나하나 소리를 체크하고

같이 고민하고 녹음하고 편집까지 해 준, 나의 기타 선생님 진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명'을 들려준, Chris,

대륙의 끝으로 보낸 초대장 하나를 들고

제주까지 기꺼이 소리 산책을 와 준, Ludvig,

어쩌면 참 황당할 수도 있는 우리 둘의 만남을

놀라운 색감으로 완성시켜준,우리 딥샤워 선생님,

이렇게 까다로운 곡을, 함께 고민하고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다운 현의 융단을 깔아준, 인영 누나.

모두 감사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세상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보현의 '통역자'가 되어준

승환,

수정,

MiiZUKi 씨.

위대한 가수들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뿍 담아 마음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다.

(왈왈. 고맙습니다. - 보현 올림)



그리고 이 앨범의 주인공, 보현.

거친 길을 함께 걷고 있는 나의 아내에게



긴 시간을 묵묵히 기다려주고

저의 앨범을 맞이해 준

세상의 모든 물고기님들께

말로는 결코 다 할 수 없는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행복한 몸과 마음으로

공연장에서 뵙겠습니다.



한 번 더

고맙습니다. 모두.



폴 드림.

마스터링을 마치고

10 시간이 넘도록 이어진

13 곡의 마스터링을 마치고

눈밭 같은 구름 너머로 새벽 노을을 보며

첫 비행기로 내려왔습니다.



정말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폴 드림

너무나 오랜만에 안부를 전합니다.




날이 꽤 쌀쌀해졌습니다. 다들 잘 지내시는 지요.

너무나 오랜만에 안부를 전합니다.



마지막 안부 인사가 언제였나 싶게

몇 계절이 지나가버렸습니다.

그간 물고기 마음에 자주 소식을 남기지 못해

그저 무척,

죄송합니다.



짐작들하시듯,

그간 부지런히 새 앨범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르면 11월 말 혹은 늦어도 12월 초면

세상에 나오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실은, 작년 여름에 손을 다친 이후

올해에 앨범을 낼 수 있을 거라고 감히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건지

이번 작업은

유난히 길고 깊었습니다.

그런만큼 신보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저는 꿈만 같습니다.



총 11 곡 혹은 12 곡이 수록될 이번 앨범은

저의 첫 '컨셉트 앨범'입니다.



많은 분들께

작은 선물이 되기만을 바라고 또 바라며,

언젠가 어느 지인께 드렸던 메일의 일부로

짧은 안부를 마무리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열심히 가겠습니다.



"그간 저의 앨범 중

가장 파격적이고

가장 이상하고

가장 놀라운 앨범이 될 것 같습니다."




폴 드림.

SJF2019, 2/1-2/28



set list @ SJF2019

  1. 안녕, (#8)
  2. 평범한 사람 (#4)
  3. 봄눈 (#4)
  4. 바다처럼 그렇게 (#8)
  5. 스며들었네 (#7)
  6. 바람, 어디에서 부는 지 (#3)
  7. 아직, 있다. (#7)
  8. 불 (#5)
  9. 은하철도의 밤 (#8)
  10. 걸어가자 (#4)
  11. 어부가 (#5)
  12. 고등어 (#4)

더 읽기

1/1-1/31

1/1

여전히 흐리고 찌푸린 하늘. 어둡고 시린 새해 첫 날이다.

포슬포슬 눈이 내리는 숲으로 갔다. 뽀도독 뽀도독 눈 밟는 소리를 들으며 한 발 한 발 오르다보면 어느새 주변 풍경이 바뀌어있다. 눈밭이 된 오솔길에 새의 발자국이 찍혀있고 이름 모를 동물의 흔적이 보인다. 고요한 삼나무 숲길.

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