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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2011년의 연말. 어느날, 연한 노란빛 옥수수가 침묵을 깨고 꿈틀대며 소리를 냈다. 옥수수들의 대화가 - 세계 주요 패권국 중 하나인 - 영국의 브리스톨에 있는 어느 대학 연구실에서 처음 포착된 것이다. 꽤 큰 소리로 재잘대고 티격티격대는 식물의 소리가 정밀한 공학용 레이저 기기를 통해 우리의 귀로 전해져왔다. 식물들도 소리를 낸다는 것,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들리는 소리에 따라 행동을 바꾸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한 공식적 사건이었다.

(...)

개인적으로 나는 늘 스스로를 식물 세계, 혹은 더 넓게 말해 자연을 관리하는 존재로 여겨왔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이상 스스로를 나와 다른 세상에서 떨어뜨려 놓은 채 그들의 지배인인으로 여기는 위치에 있고 싶지 않다. 옥수수들과도 대화를 시작하게 되면서 옥수수들은 우리에게 또다른 메시지를 전해준다. 식물도, 자연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소유당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자연에게는 인간의 관리 따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같이 존중받고 세상과 타자를 이해하는 길로 이어진 교감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 Monica Gagliano <Thus spoke the plant>

1/17

온 동네 바다에 엄청난 모자반이 떠밀려왔다.

Underneath 작업. Uher report로 양쪽 채널의 소리를 옮겼다가 다시 컴퓨터로 받았다. 역시 위상에 문제가 있다. 테입 길이도 턱없이 짧다.

메탈 테입을 써보았다. 다만 카세트 데크의 헤드룸이 너무 낮다. 그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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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게 C+ 만 거쳐서 가믹스를 받았다. w/ Triode 모드. 160 Hz lo-cut.

Underneath를 프린트하면서 틀어둔 채 보현에게 Monica의 책을 읽어주었다. 보현은 무슨 내용인 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도 무슨 내용인 지 정확하게 알 지 못한다. 보현은 어쩌면 아빠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음악 같은, 그런 것이다.

카톡이 많이 왔다. 주민등록 상 가짜 생일 덕에 몇 년 만에 종한과 통화도 하고, 동진과도 통화를 했다.

1/19

아침에도 보현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그건 나에게 읽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카센터에서 엔진오일을 갈고 공기압 점검을 받았다. 잠깐 사이 카센터 근처 냇가를 걸었다.

동하와 누나에게 소포를 보냈다.

모니카의 리뷰 페이퍼를 읽었다.

여러 가지 테입으로 앰비언스를 녹음해두었다.

John이 relapping 작업이 다 되끝났다고 연락해 주었다. 많은 기술자들이 그렇듯, 무엇이 문제였는 지, 어떤 작업을 했는 지, 구체적인 얘기가 없다. 디테일은 체념한 지 오래다.

1/20

건강 검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이번에도 내시경 도중 잠이 깼다.

보현과 신나게 보물 찾기를 하며 놀았는데, 어딘가 앞 발을 다친 것 같다. 그리고 왼쪽 뒷 다리가 많이 부어있다. 

1/21

병원에 가서 선생님께 보현을 보여드리고 약을 타왔다. 약을 먹을 때 만이라도 많이 걷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신다. 보현을 기쁘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천천히 줄어드는 것만 같다. 다른 기쁨을 또 찾아야 한다.

노랑 할미새와 댕기흰죽지와 새끼 바다직박구리와 논병아리들을 보았다.

비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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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비가 온다. 봄비 같다.

빗소리에 아침부터 보현이 안절부절 못한다. 금강경을 틀어주고 겨우 안정을 시켰다.

보현은 여전히 다리가 불편해 보인다.

집 앞 바다에서 아기 뿔논병아리 한 마리와 아기 쇠백로 한 마리가 와서 서로 어울리며 물놀이를 하고 먹이도 찾으며 놀다 갔다.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따라 곡을 10 분 이내로 줄여야한다.

보일러를 고쳤다.

종일 보현을 케어했다.

귤밭에 갔다. 동해를 입은 나뭇잎들이 조금 보인다. 큰 걱정은 안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쓰인다. 그새 꿩들이 엄청나게 많이 모여들었다. 오두막에서 서밍 믹서를 들고 집으로 가져왔다. 오두막의 녹음 장비들이 하나둘 집으로 모이고 있다. 꿩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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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으로 노랑부리 저어새를 만났다.

테입 작업. 또 데크가 말썽을 부리기 시작하네. 차도 집도 사람도 기계도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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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우지가 날개를 말리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귀엽다. 고니들은 저렇게 날개를 펼치며 서로 사랑을 한다지.

보현을 목욕시켜주었다. 오늘 왠일인 지 너무나 힘들어 한다. 몸이 아프면 기분도 나빠지기 마련이겠지.

1/25

읍사무소와 면사무소 들러 이런저런 지원 사업을 알아보았다. 유기농 인증 농가가 받을 수 있는 지원금이 꽤 많다. 고민 끝에 발효 액비 지원은 안하기로 했다. 이미 충분히 저렴하게 공급받고 있다는 걸 알고 나니 새삼 감사한 마음이다.

RTM tape 만한게 없구나. tape을 거쳐 DAW로 소리를 옮긴다.

1/26

비 오는 아침. 기계상사에 갔다. 오랜만에 사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건강은 어떠신 지 안부를 주고 받았다. 필요한 기계며 관수와 방제 시설 견적으로 받고 돌아와 시설 지원 사업을 신청했다.

도외에서 유기자재 공시가 된 패화석과 골분을 알아보고 견적을 요청하고 전화를 주고 받던 중, 뜬금없이 김숙씨가 전화를 걸었다. 팟캐스트 녹음 중인가본데, 난 또 비료회사 사장님인 줄 알았네.

Neumann V475 서밍. 이런 음악에는 꽤 괜찮다.

1/27

아내의 보호자가 되어 병원에 갔다가, 모처럼 외식을 하고 돌아왔다.

1/28

저녁에 강풍 예보. 풍랑 경보가 떴다.

과수원에 가서 바깥 단속을 하고 돌아왔다. 오후부터 바람이 거세진단다.

남은 레몬을 모두 따왔다. 짭짤하고 감칠맛이 넘치는 맛. 어떻게 설명할 수 없이 감동적이다.

1/29

청머리 오리를 보았다.

눈이 온다.

내 음악을 내가 모니터하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임상 실험 1상 성공.

효진씨와 한 시간 정도 통화를 했다.

보현과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걷는 나날이다.

모니카의 책을 다 읽었다. 

농업경영체 변경 등록을 마쳤다.

마란츠 데크 수리를 문의했다.

1/30

아침엔 고방 오리, 낮엔 개똥지빠귀와 노랑 할미새를 만났다.

Underneath 스템 작업 중 스톱을 해버렸다.

I.V. 스템 뜨기 완료. 믹스 전까지 더 이상 건드리지 않겠다.

현 편곡 세션을 다시 열었다.

1/31

현 편곡.

부산집에서 또 물이 샌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무래도 다녀와야겠다.

2/1

봄비 같은 내음이 나던 날.

효진씨에게 음악을 보내주었는데 꿀낮잠을 잤다고 문자가 왔다. 임상 실험 2상 성공.

2/2-4

부산에 다녀오다.

집에 돌아온 밤, 별이 총총 떠있다. 천왕성이 보일 지도 몰라. 아내의 말을 듣고 마당에 나갔다. 서쪽 하늘에 나지막히 화성이 떠있고 그 아래에 천왕성이 있다는데, 보이지 않는다.

시애틀에서 동하가 보낸 소포가 한 달도 넘게 걸려 왔다. 메리 올리버의 시선집과 커피 등등이 들어있다.

2/5

쇠오리 한 쌍을 보았다.

대농어 한 마리를 만 이천원 주고 사왔다. 너무 싸서 미안할 지경이구나.

동하와 통화를 했다.

이른 아침, 메리 올리버의 시를 보현에게 읽어주었다.

어쩌면 나에게 읽어주는 건 지도 모른다.

머리와 가슴이 하얀 물수리 한 마리가 포구 전봇대 위에 앉아서 물끄러미 내려다 본다.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학에서 근사하게 새로 지은

교실을 내준다. 여기 하나 뿐입니다,

말해주며, 개는 데려오지 마세요,

계약서에 그렇게 되어있더군요. 나는 말했다 (나는

그걸 확인했었다)

우리는 다시 합의를 봤다. 오래된 건물의

낡은 교실로 옮겨가기로. 받침대에 괸 채

문이 열려있고, 교실 안엔 물그릇이

하나 있다. 벤의 목소리가 멀리서

짖고 우는 개들의 목소리에 뒤섞여

들려온다. 그때, 모두 교실로 들어왔다 -

벤, 벤의 친구들, 아마 이름 모를 개 한 마리였나, 두 마리였나

모두 목이 말라보이는데

즐겁다

물을 들이킨 개들이

철퍼덕, 학생들 속에 섞여 앉는다 학생들은 그걸

좋아했다. 모두가 목마름으로, 행복하게 시를 쓴 날

Mary Oliver - The poetry teacher

2/6

출판사에 추천사를 보내었다.

보현이 왠일인지 많이 걸으려 하지 않아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달리기를 했다. 봄 같은 날, 흠뻑 땀을 흘렸다.

바다 생물 도감을 읽었다. 홍합과 담치가 다른 거구나.

몇 달 만에 기타를 잡았다.

2/7

새벽 달이 예뻤다. 그러나 미세먼지가 최악인 날이다.

평영을 하듯 물을 가르는 뿔논병아리 한 마리를 만났다. 바다 안개와 미세 먼지가 온통 뒤섞인 바다.

매화가 피었다. 꽃나무는 해의 길이를 보고 꽃을 낸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운동장 곳곳에 피어있던 노랑 벌노랑이들이 생각났다. 이젠 우레탄 트랙 아래로 모두 사라져 버렸지. 벚나무가 있던 자리는 연녹색 펜스가 둘러쳐지고, 인적 드문 농구 코트가 되어버렸다. 나무 아래 묻어준 고양이는 지금 어디에 가 있을까. 휑한 초록빛 코트 바닥 아래에 아직 잠들어 있을까.

보현이 하루종일 행복한 날. 

Tom Gallo 의 음악을 다시 듣는다.

아내가 <구름을 사랑하는 기술> 이란 책을 읽고 있다. 인간이나 구름이나 별 다를 것 없다.

2/8

바닷가에서 밭종다리를 만났다.

바람 불고 추운 날, 아내과 함께 달렸다.

John이 보낸 헤드를 릴데크에 끼우며 혼잣말을 했다. 안 될 거야. 이번에도 안 될 거야. 나는 최선을 다했어. 그냥 프리앰프로 쓰면 되지.

테스트.

Terry가 relap하기 전 상황까진 회복되었다. 다시 말하면 대서양을 건너 태평양을 건너 돌고 돌아 그 자리란 얘기. 왼쪽 채널은 여전히 불안하고 오른 채널은 안정적이다. MRL 테입을 재생해본다. 재생 헤드는 정상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사이즈가 다른 테입을 이리저리 바꿔 끼워보고, 돌려보고 닦고 조이고 기름칠 하고 별 짓을 다해봐도, 소용이 없다.

2/9

John은 내게 tape guide를 바꿔보라는 조언을 했다. 꽤 긴 메일을 보내주었는데, 여하튼 시키는대로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사를 다 풀고 뚜껑을 열고, 아니 그 전에 tape guide라니 도대체 뭘 말하는 건지 검색을 해보았다. 세 개의 guide 중 맨 왼쪽 것만 겨우 손이 닿는다. 어찌어찌 열어서 John의 조언대로 뒤집어 다시 끼워본다. 녹음 헤드에 제일 가까운 중간 guide는 손도 잘 닫지 않을 뿐더러, 아무리 힘을 써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른쪽 guide는 이미 반쯤 풀려있는데 뒷 편 나사에 접근할 수가 없으니 빠질까봐 오히려 적당히 조여두었다.

이렇게 하루종일 릴데크와 씨름을 하다 지쳐버렸다. 그런 나를 보다못한 아내가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달리기를 하고 돌아왔다.

2/10

뿔논병아리가 나를 보자마자 달아났다. 사람이 얼마나 싫었으면. 두려움도 DNA에 각인이 된다고 하지.

차를 마시며 아내와 '몰입', '탈몰입'에 대한 얘기를 했다.

내게 몰입은 늘 쉽지만, 탈몰입이 어렵다. 그게 제일 큰 문제다.

결국 고쳤다.

2/11

15 ips의 속도로 10.5 인치의 릴에 녹음할 수 있는 곡의 길이는 30분 남짓. <너와 나>의 절반도 녹음하기 어렵다. 나는 앨범에서 다섯 곡을 고르고 골라 새로 사둔 ATR 테이프를 꺼내 녹음했다. 덜덜 떨면서 새 테입을 감고, 재생 버튼을 누르고,

보현과 나란히 앉아 음악을 들었다.

음악만 들었다. 다른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2년 전, 우린 이 음악을 같이 만들었었지.

음악이 먹는 물이라면, 다들 정수기를 하나씩 들고 사는 세상. 언제나 틀어놓아도 된다. 노래는 무한히 흘러나오니까. 잠글 필요도 없다. 아껴 듣는 들 돈을 덜 내는 것도 아니니까.

물론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음악을 마실 수 있는 공간도, 음악 한 컵을 마실 수 있는 러닝타임도, 심지어 배터리까지 모든 게 유한했다. 별안간 믹스테입을 만들고 싶어졌다. 나만 들을 수 있도록, 내가 아끼는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너무나 유한한 길이의 믹스테입을 만들고 싶어졌다.

나는 음악만 듣고 싶어졌다. 음악을 조연이나 배경이 아닌, 주연 배우로 두고 돈과 시간을 기꺼이 쓰면서 음악을 듣고 싶어졌다.

보통 나는 혼자서 숲에 가곤 해, 동행하는 친구 하나 없이 말야. 내 친구들은 죄다 웃기 좋아하고 말하기 좋아하고 그러니 숲에 딱히 어울리진 않거든

개똥지빠귀에게 말을 걸거나 늙은 떡갈나무를 껴안는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아. 나는 기도를 하는 나만의 방법이 있거든. 다들 그런 거겠지만

그건 그렇고, 혼자있으면 사라져버릴 수도 있지. 모래 언덕 위에서 여우들이 신경 끄고 뛰어놀게 꼿꼿한 들풀처럼 앉아있을 수도 있고, 들릴 듯 말듯 장미가 부르는 노래를 들을 수도 있겠지

-

누군가 나와 함께 숲에 간다면, 분명 그 사람은, 내가 몹시 사랑하는 사람일테지

Mary Oliver - How i go to the woods

같은 시를 두번 씩 읽는다.

기연 윤정씨와 탐조를 하러 갔다.

장을 봤다.

2/12

설. 누나 내외를 만났다.

2/13

어제 저녁, 보현에게 책을 읽어주다 문득 방안이 어두운것을 알아채렸다. 스탠드도 꺼져있고 독서등도 꺼져있었다. 방안 백열등 전구도 꺼져있다. 그때 생각했다. 드디어 작업에서 떨어져 나왔구나.

어느 작가의 에세이를 읽는데 보현이 나를 뚫어져라 본다. 이 책, 읽지 말까? 시 읽어 줄까? 메리 올리버의 책을 들고 앉자 보현이 책 냄새를 맡고 곧장 내게 기댄다.

시를 읽는다는 건 뭘까. 같은 시를 두 번씩 읽는다는 건 뭘까.

눈이 밝아온다.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1 kHz 보다 조금 낮은 피치, 800 Hz 정도 될까. 어, 내가 1 kHz의 소리를 알게되었구나. 릴데크의 레퍼런스 주파수. 그동안 너무 많이 들은 거구나.

보현이 자신의 침대로 가서 눕는다. 화장실로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보현은 잠을 자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화장실 창문 밖에서 800 Hz의, 그 소리가 다시 들린다. 양어장인가.

집앞을 지나는 올레족들이 많아졌다.

커튼을 닫았다. 소파에 앉자 보현이 다시 내게 돌아와 곁에 눕는다. 

버지니아 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안

줄곧 여우가 보고 싶었다

결국, 여우를 만났다

여우는 고속도록 위에서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차들은 줄 지어 쌩쌩 지나고

나는 그 아이를 안아

들판으로 데려 갔다

아이는 몸을 꿀렁대며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잘 가

전조등에 비친 아이의

눈에 뜬 빛줄기를 보며,

작별 인사를 건넨다

두 번의 아침이 지나고

나는 또 다른 여우를 만났다

아이는 고속도로에 누워있었다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이를 품에 안고

나는 들판으로 갔다

그곳에서 본 아이의 몸은

절반은 잿빛

절반은 핏빛

차들은 줄을 지어 쌩쌩

차들은 끊임없이 달린다

잿빛 여우야, 잿빛 여우야,

붉디, 붉은, 핏빛의

Mary Oliver - 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