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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인사 그리고 일기: 11/1-11/30

난 침대가 하나 있지.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몸에 딱 맞는 이 침대에서
혼자 자는 게 좋을 때가 있어
눈을 감으면 금세 꿈에 빠져들거든

하지만 가끔, 꿈은 너무 어둡고, 사납고, 오싹해
잠을 깨. 무서워. 왜 무서운 지도 모르겠어
잠이 오지 않아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가

그래서 당신의 침대로 올라간다. 달빛 한 줄기가 내린다.
사랑하는 달빛이 당신을 비출 때
난 알았지. 아침이 오고 있다는 걸.

누구라도 이런 곳이 필요하다는 걸

- Mary Oliver - 'Every dog's story' from "Dogs songs"

RIP, Mary Oliver (1935-2019)


다들 잘 지내시나요. 유난히 따뜻한 겨울입니다. 겨울의 끄트머리에서 밀린 가을의 일기를 쓰려니 기분이 묘하네요. 몇 가지 소식부터 전해드립니다.

올해엔 루시드폴의 정규 앨범이 나오려나, 생각하는 분들이 많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019년은 여러모로 특별한 해가 될 것 같은데요. 싱글이나 미니 앨범이 흔한 요즘 시절에 정규/비정규 앨범의 구분이 딱히 의미없긴 하지만, 조금은 특별한 - 굳이 말하자면 '비정규 앨범' 형식의 작품집을 만들고 있습니다. 11월말을 목표로 하고 있고, 그 사이 고민하고 준비한 것들을 빚고 있습니다. 작년 여름의 사고 후에 많은 것이 바뀌었는데, 좋든 싫든 받아드리기로 했고 지금 할 수 있는 것 혹은 지금 해야겠구나, 싶은 것을 그냥 해보려 합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지금보다 더 부지런해져서, 앨범이 나오기 전까지 해적방송에 모든 과정을 기록해두고 싶지만, 예전 경험을 비춰볼 때, 그러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인스타그램의 계정(@institute.for.silence)을 하나 만들었는데요, 수상한 이름이긴 합니다. 아마도 앞으로 저의 많은 비정규적인 작업을 이 '연구소'에서 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한때는 연구소에서 고분자를 합성하는 일을 했었는데, 제가 차린(!) 이 연구소에서는 소리, 음악, 혹은 '소리 없음', '음악 없음'을 합성합니다. 일상 생활을 올리는 개인 인스타 계정이라기 보다, 실험 노트 정도로 생각하고, 이 사람이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슬쩍 눈팅하는 용도라 보시면 되겠습니다.

오늘 아침 산책을 하면서, 이 겨울이 가기 전에 눈을 한 번 보고 싶다, 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음 일기를 쓰기 전에 딱 한 번 쯤은 눈이 펑펑 와주면 참 좋겠는데. 그럴 수 있으려나 모르겠습니다. 남은 겨울도 잘 보내시길 빌게요. 이미 봄이 왔는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폴 드림


11/1

작업을 계속하다. 각 트랙의 스템들을 바운스했다.

11/2

스템 믹스. 보컬이 크고 베이스의 발란스가 좋지 않다.

바닷가에 홀로 있는 암컷 직박구리를 보았다.

11/3

믹스 완성. 찢어진 나비의 날개를 보다. 상순을 만나고 돌아오다.

11/4

자주 가는 숲길 가에는 야생 상태나 다름 없는 귤나무들이 심겨져 있다. 누군가 심기는 했을텐데, 지금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것 같다. 나무는 한결 같이 키가 크고, 잎과 열매는 많지도 적지도 않다. 응달진 소나무 숲에서, 혼자 혹은 서로 알아서 큰 이 나무들의 귤맛은, '복잡하다'. '달다' '맛있다' 같은 한 마디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눈을 감으면 온갖 것이 떠오르는, 그런 너무도 복잡한 맛.

오늘, 세상의 채도가 네가티브 후지 필름같구나. roundwound 베이스 줄을 알아보다. 대문을 고쳤다.

11/5

다시 되뇌인다.

내 귀를 믿되, 믿지 말 것. 의심이 사라질 때까지, 의심할 것.

마스터링 2차 수정. 일본의 마스터링 엔지니어 아키히토와 통화를 했다. 그가 사용하는 아날로그 시그널 체인 사진을 보내주었다. 정찬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옇고도 선명한 하루. 이런 풍경 같은 사운드.

11/6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내 발 아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한 발짝만 내딛으면 곧장 어둠 속으로 떨어질 테고 그러면 모든 일이 끝나는 것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지나가 버리겠지요.
"사자왕 스코르판, 무섭지 않니?"
"아니...... 형, 사실은 무서워. 하지만 해낼 수 있어. 지금, 바로 지금 할 테야. 그러고 나면 다시는 겁나지 않겠지. 다시는 겁나지......"

"아아, 낭길리마! 형, 보여! 낭길리마의 햇살이 보여!"

부산행. 영호를 만나서 영호 집에 와서 정희가 내려준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집에 와서 문수와 잠시 인사를 하고 부모님 식사를 사드리고, 영안실로 가서 어머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정현과 정우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오며가며 <사자왕 형제의 모험>를 모두 읽다.

11/7

서울 부모님을 뵈었다.

11/8-9

도쿄 출장

11/10

어디선가 새끼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새끼 고양이가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는 게 분명했다. 대문 밖으로 나가 이곳저곳을 살피는데, 멀리 꿈틀대는 무언가가 보였다. 어림으로는 2 개월도 안 되었을 것 같은 어린 고양이다.

고양이는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 앞에 쳐놓은 그물 사이에 목이 걸려있었다. 그물을 빠져나가려할수록, 그물은 가는 목을 감싸고 돌았을 것이다. 조금만 가까이 가려해도 고양이는 그물에서 빠져나가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물은 목을 더 졸랐다.

난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 야생동물 구조센터에 전화를 했다. 여러번 도움을 청했던 곳이라 제일 먼저 생각이 난 곳이었다. 하지만, 야생동물이 아닌 길고양이의 구조에는 도움을 드리기 어렵다는 말씀을 하고는 다른 어딘가로 연결을 해주셨다. 그 사이에도 멀리서는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계속 들렸다.

하는 수 없이 두꺼운 장갑을 끼고 가위를 들고 고양이 근처로 갔다. 아무리 내가 안심을 시켜보려한 들 안심이 될 리가 없지만, 노래도 불러보고 낮고 침착한 목소리로 뭐라고 말고 해보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도 조금씩조금씩 다가갔다. 마침내 고양이의 코앞까지 갔을 때, 새끼 고양이는 그 작은 이빨을 드러내고 하악-, 하면서, 저리가! 싫어! 가! 라고 외친다.

어쩌겠니. 난 어떻게든 너를 살려야겠다.

얼마나 됐을까. 하루? 이틀? 어쩌면 내가 여행 중일 때부터 이렇게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아직 살아있고, 힘이 남아있는 것이 다행이다. 고양이의 목덜미 근처로 조심스럽게 가위를 밀어넣었다. 극한의 두려움과 체념이 엇갈리는 작은 눈. 목을 조르는 그물코를 하나씩 똑똑 잘라내었다. 그물이 조금 헐거워지자 고양이는 필사적으로 몸을 흔들며 제 몸만한 구멍을 뒤로 아무도 살 지 않는 빈집 안으로 후닥닥 달려가 버렸다.

11/11

일본에서 사온 음반을 하나씩 듣다. 동네 재즈 클럽에서 윤성씨와 호규와 준영씨의 공연을 보다. 말과 글로는 그릴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11/12

아침부터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오래 묵은 집안 문제를 해결했다.

11/13

긴 산행을 했다. 무채색이 되어버린 산에 하이라이트처럼 박힌 줄사철 나무의 열매. 팥배나무 열매들.

11/14

손가락 진료를 하고 상혁이형과 윤하를 만나고 돌아왔다. 형이 후드티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형은 계속 루틴에 대한 얘기를 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더 내서 더 자주 만나야할텐데.

11/15

자동차 서비스 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점검을 다 했는데, 배기구 촉매가 완전히 삭아서 전체적으로 교체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모두 다 고치려면 백여 만원의 돈이 든다고 하신다. 깜짝 놀라서, 만일 수리를 하면 얼마나 더 탈 수 있냐고 물어보니, 그건 모르는 일이라고 하신다. 어리석은 질문이긴 했다. 보면 볼수록 고칠 데가 보이는 판에 그분들이 무슨 수로 장담을 하겠는가. 아무래도 여기까지인가. 폐차를 하지 않고 차를 외국으로 수출하는 방법도 있다고 한다. 아직 갈 곳이 있다는 말 만으로도 어딘가 안심이 된다.

11/16

비가 온다. 새 트럭을 계약했다.

아키히토와 전화를 했다. 스튜디오 기기가 고장이 나서 화일을 못 보냈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병원 여기저기를 다니며 서류를 떼었다.

11/17

아주 가끔이지만, 바다가 하늘보다 빛날 때가 있어.

윤슬이네가 왔다. 마지막 짧은 버전의 마스터링 버전을 보냈다. 레몬빛 노을을 보았다.

11/18

돈이 안 되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는 생각 따위에 유혹되지 말 것.

- Arthur Miller

붉은 서쪽 새벽 하늘.

11/19

트럭을 보내고 왔다. 너는 어디로 어느 나라로 가게 될까.

그곳이 어디든, 잘 가거라. 고마웠어. 그동안 너무 애썼다.

트럭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 어둡고 흐린 공단의 길가 한 구석 전봇대 아래에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죽어있다.

11/20

고양이와 눈을 마주쳤다.

아내의 책이 도착했다.

11/21

11/22

새 트럭이 온 날. 조용히 고사를 지냈다.

세탁소에 들렀다. 레몬빛 진박새의 유조를 보다.

11/23

암컷 딱새를 보았다. 타이어에 바람이 없어서 공기를 채우고 돌아왔다. 아내가 아프다. 온천을 했다.

11/24

소나웍스 레퍼런스 4로 모니터 체크를 하다. 소나기가 내린다.

11/25

공사중인 운동장에 갔다. 우리가 그렇게 아끼던 나무들이 사라져버리고 없다. 고양이를 묻어준, 봄이면 그 고양이 무덤 위로 하늘하늘 꽃눈이 내리던 곳이, 흔적도 없다. 흙과 꽃잎과 풀과 자갈이 있던 곳에는 콘크리트와 우레탄과 쇳덩어리들만 뒹군다. 나무가 있던 자리에, 아무도 없다.

11/26

과수원에는 공사장에서 버린 온갖 쓰레기들이 뒹굴고 있다. 밭 주변의 쓰레기를 줍고, 누가 버렸는 지 알 수 없는 음식물들을 묻고, EM을 뿌려주었다. 똥을 싸놓은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다. 공사장의 반장분께 전화를 해서 정리를 부탁드렸다. 소용이 있을 지는 모르겠다.

선생님께 올해 귤이 너무 맛이 없다고 하소연을 했다. 선생님은, 괜찮다고만 하셨다. 시유지 관련해서 공무원이 오셨다. 비료 신청을 했다.

11/27

계단식 귤밭 한가운데에 사는 동원씨와 시내씨를 만나러 갔다. 두 마리 고양이 - 오월이와 동주와 인사를 했다. 남쪽 햇살을 마음껏 맞으며 보현이까지 함께 산책을 하고 차와 간식을 먹었다. 둘레길을 한참 걷다가, 서쪽의 어느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

11/28

미세먼지가 자욱하다. 사운드 샘플 정리를 했다. 윤정씨가 꿈이야기를 해주었다.

11/29

유기 농업 자재를 알아보다. 같은 유기 자재라도 어떤 회사의 제품은 등록이 안 되어있는 경우가 있다. 등록 여부와 가격을 꼼꼼히 비교하다.

11/30

이곳에 온 지 처음으로, 이곳에서 머리를 잘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