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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1-9/13

8/21

집으로.

8/22

지구 상회의 새 보금 자리는 작고 아늑했다. 바람이 잘 들고 햇살도 잘 든다. 창문 너머 풍경이 있어 좋다. 방수가 되지 않은 시멘트 옥상을 보니, 처음 섬에 온 날이 생각났다. 우리집 옥상도 그랬지. 금귤에이드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동원씨가 전해줄게 있다며 왔다. 새로 낸 사진집이 엘피를 닮아서 깜짝 놀랐다. 냉큼 사인을 받아왔다.

8/23

오두막에 방역을 하러 세 분이 오셨다. 반 나절이 조금 지났을까.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 되었다. 4 년 가까이 창문에 붙어있던 스티커들, 태풍에 붙여놓은 테잎 자국, 온갖 먼지며 벌레들의 잔해가 말끔히 치워졌다.

8/24

아침 햇살이 아름답다.

멧비둘기 부부가 서로를 부르다 교대를 했다. 둥지에 앉아있는 한 마리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다른 파트너가 둥지로 올라오고 새끼들을 품는다. 멧비둘기 부부는 모든 노동을 나눈다.

8/25

물부엌 청소를 했다.

태풍 예보가 있다.

최종 디자인을 네덜란드로 보냈다.

8/26

태풍 바비가 집 앞 바다를 지나 육지로 올라갔다. 밤이 아닌 낮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소나무가 휘청대고 둥지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부모 비둘기는 필사적으로 둥지를 지키려 애썼다. 바람은 점점 더 거세지고, 새끼들 곁에 있는 것이 오히려 위험하겠다 느꼈는지, 이내 나무를 떠났다. 비를 뚫고 옥상에 올라가 보니, 손바닥보다 작은 아기새 두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8/27

밭도, 집도, 큰 사고 없이 태풍이 물러갔다.

우린 두 번의 태풍을 이겨낸 아이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몸집이 큰 아이는 바비, 작은 아이는 장미.

8/28

문호, 제익을 무주에서 만나다. 

8/29

무주에서의 둘째 날.

대학 친구들을 만나며 문득 알았다. 나는 나를 몰랐고, 그래서 공과대학을 갔다는 걸.

8/30

'무슨 음악'을 듣고 있는가, 보다 '무엇'을 듣고 있는가가 더 중요한 지도 모르겠다.

집으로 와서, 나일론 기타 줄을 갈았다.

8/31

올해 첫 관주를 하다. 총 4000 리터.

2020년에 만든 EM-B 한 말에 더하기 2019년 만든 EM-B 한 말과 남은 아미노액비를 네 번 나누어 관주해 주었다. 관이 새는 곳이 있는데, 어쩔 수 없다. 겨울에 하나하나 손을 보는 수 밖에.

태풍이 또 온다고 한다. 창고 정리를 하고 태풍 단속을 했다.

경영난으로 인해 단골 우체국이 우편 취급국으로 바뀐다는 공고를 보았다.

9/1

방역업체에서 카페트를 가져다 주셨다.

바람이 점점 심해진다. 마당에도 액비를 관주해주었다. 초피나무 사이로 호랑 나비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담쟁이와 앵두 나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바람이 거세질수록 나비는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리고, 떠났다.

9/2

태풍 마이삭.

해가 지자 미친 듯이 비바람이 불었다.

버티고 버티던 장미가 떨어져 버렸다.

차갑게 식은 장미를 안고 많이 울었다.

밤새 옥상에 올라가 바비를 살피다 잠이 들었다.

9/3

앵두 나무의 주지가 부러졌다. 가지를 잘라내고 톱신 페스트를 발랐다. 널부러진 쓰레기들을 치웠다.

과수원의 쑥대낭이 쓰러져 귤 나무를 덮쳤다. 나무를 전기톱으로 잘라냈다. 다행히 귤나무가 다치지 않았다. 오두막 문틈으로 물이 샌 것 같다. 문이 물을 잔뜩 먹은 것도 같다.

바비는 대견하게 태풍을 견뎌냈다. 아직 어미새가 오지 않는다. 어서 오면 좋겠는데.

이름을 잘못 붙여준 걸까. 나는 하루 종일 나를 원망했다.

9/4

가스 점검 차 기사님이 오시다. 바비의 엄마가 옥상에 앉아 우리를 물끄러미 내려보았다.

새와 나눌 수 있는 게 음악 밖에 없는 것 같다.

바비에게 모차르트의 피아노 곡을 틀어주었다.

많은 이들과 안부를 주고 받았다. 병원가서 약 타고 선생님들께 책 선물을 했다. 유기농자재 지원사업 서류를 만들었다. 가을 비료를 주문했다, 추석 전에는 보내주시겠다고 한다.

9/5

또 태풍 소식이다.

오두막 문틈을 이중으로 막고, 분무기도 창고에 넣고 단속을 하고 돌아왔다.

9/6

태풍 하이선.

마이삭보다는 심하지 않다. 아직 방심할 수는 없지만.

9/7

태풍이 무사히 지나갔다.

바비가 무사하다. 이제 아무 걱정이 없다.

집시기타 줄을 갈았다.

9/8

가을방제 3-1: EM-B 5L + 아미노 2L + 키토목초 5L + 소금 1kg + 유기칼슘 1.5L.

기술센터에 광합성 세균을 알아보았다. 매년 규정이 바뀌는데, 올해엔 한 번에 30 리터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다만, 규칙적으로 받을 수가 없다는 것도, 30 리터를 받아도 냉장 보관할 곳이 없다는 것도 함정이다.

풋귤 따다.

뱃불 색깔이 더 짙게 변했다. 가을인가.

9/9

가을방제 3-2: 레시피는 어제와 같다. 날이 어제보다 덥다.

새로 산 아미노 액비 냄새가 별로 좋지 않다. 4 리터를 덜어서 EM-B 4리터와 섞어두었다.

방제 중에 지영 아버지와 성현씨가 와서 오두막을 둘러보았다. 내일 보수 공사를 하기로 했다.

바비가 소나무를 떠나 마당 곳곳을 다닌다.

저녁 산책길에 물총새 한 쌍과 물뱀을 보았다.

9/10

성현씨와 재광씨가 왔다. 오두막 보수 첫 날.

몰딩을 다 떼어내고 일층 천정 osb 합판을 잘라냈다. 전부 갈지는 않고 많이 썩은 부분만 교체하기로 했다. 그리고 안쪽으로 몰딩을 다시 붙였다. 쪽지붕에 놓인 에어컨 실외기를 떼어내고 너와를 모두 걷었다. 빗물 받이를 달았다.

집에 돌아오니 유기농 인증서가 와있다.

7 년 만에 유기농 농가가 되었다.

9/11

보수 이튿날. 쪽지붕의 방수시트 한 번 더 깔고 아스팔트 슁글을 올렸다.

꽤 큰 쌍살벌 집을 발견했다. 벌은 날개만 타면 끝이에요. 1 초도 안되는 시간, 노련한 119 대원이 토치로 벌집을 태우고 금세 돌아가셨다.

한두 시간이 지나고, 팔뚝을 찌르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쌍살벌 한 마리가 멀리 날아가는 것이 보인다. 복수를 했구나. 그래. 이 정도라면 기꺼이 감수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하며 보건소로 갔다.

9/12

아침 일찍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았다. 신기하게도 선생님이 나를 기억하신다. 어 저번에도 벌에 쏘이셨잖아요. 손등에.

바비가 집에 올 때를 기다렸다가 장미를 묻어주었다.

바비는 소나무에서 물끄러미 우리를 내려다 보았다.

9/13

하루 종일 바비는 소나무를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