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u Close

여름 인사

모두들 무탈하신지요. 오랜만에 안부를 전합니다.

올 봄, 저는 유난히 물 속을 자주 걸었습니다. 물 속을 걷다보면 매일 다른 물빛을 만나게 됩니다. 햇살도 물너울도 언제나 다르고, 반짝거리는 물결 속을 걷다보면 시간도 언제나 다르게 흘렀습니다. 물 속을 걸으며 저는 왠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음악을 만들고 싶다. '카피 앤 페이스트'가 아닌, '반복 없는 반복'의 음악. 다른 축의 시간으로 흘러가는 음악. 몸과 마음을 감싸주는 음악. '물' 같은 음악을 만들고 싶어.

주로 새벽 혹은 이른 아침에 곡 작업을 했습니다. 작업을 하다 점심을 먹고 과수원에서 일을 하고, 다시 수영장에서 물 속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봄과 여름을 지나니 만들어진 곡이 열 몇 곡이 넘었습니다. 그 중 네 곡을 골라서 다듬고 믹싱을 했습니다. 마스터링까지 끝나고 보니 네 곡의 러닝타임이 정확하게 40 분인데, 어이쿠 그만 정규 음반의 분량이 되어버렸네요.

다른 사람을 위해 평생 음식을 만들어온 요리사가 자신을 위한 음식을 처음 만들었을 때, 이런 기분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곡들은 음원 사이트에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어제 <Moment in love>가 유튜브에 발표되었는데 다른 곡들은 어떻게 될 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음원이나 CD 대신 LP를 만들 예정입니다. 내일 예정대로 베를린에서 마스터 커팅을 하고, 마스터 라커를 플랜트로 보내고 나면 첫 테스트 프레싱까지 한 달에서 한 달 반이 걸립니다. 그리고 다시 독일의 본에 있는 마스터링 엔지니어가 테스트 프레싱을 받아서 오케이 사인을 주면 정식 프레싱을 시작하는데, 또 한 달 반이 더 걸린다지요.

시디를 만드는 일이 이메일을 쓰는 것과 같다면, LP를 만드는 건 손편지를 쓰는 것과 비슷합니다. 편지지도 세심히 골라야 하고, 마음에 드는 펜도 골라야 합니다. 또박또박 음악을 새겨줄 cutting engineer도 찾아야 합니다. 디지털 마스터링과 달라서 마스터링을 할 때도 신경 쓸 것이 더 많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무척이나 번거롭고 낯설지만, 그만큼 저는 즐겁습니다.

이 '손편지'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석 달은 지나야 전해지겠습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가을이 훌쩍 지나, 아마도 11월 말 혹은 12월 어느날 쯤 크리스탈처럼 투명하고 옅은 푸른색이 섞인 어여쁜 마블 바이닐이 도착하겠네요. '나'를 위한 요리이긴 하지만, 아주 조금, 몇 분의 손님들을 모실 생각입니다. 300 장 정도의 LP를 만들게 될 듯 합니다.

풀벌레 소리를 들으면 가을이 다 온 것만 같은데, 날은 참으로 덥네요. 그래도 종일 비만 내리던 7월을 생각하면 이 따가운 햇살도 축복 같기만 합니다. 저번 달보다는 더 뽀송해진 나무들 사이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면서도 햇볕이 있다는 것이 그저 감사하기만 합니다. 일기가 많이도 밀려있네요. 다시 한 자 한 자 적어보겠습니다.

모두 건강하시길 바라고 또 바랍니다.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