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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3/23

3/16

환한 봄 날, 장독을 씻었다. 따스운 볕 아래 독을 엎어두었다. 유리창을 닦았다. 말개진 유리에 바다가 비쳤다.

 

3/17-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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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가 내리던 날, 노란 유채꽃이 여기저기서 흔들거렸습니다. 이렇게 타국에서 당겨 본 봄 풍경이 싫지도 낯설지도 않았습니다. 무카히바라 역은 무심히 지나치면 놓칠 수 밖에 없는 작은 역입니다. 역 근처 카페에서 택시를 불러놨는데, 어디로 사라졌는지 농원의 지도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난감하 마음에 부랴부랴 로밍 신청을 하는 사이 택시가 미끄러져 왔습니다. 큰 기대 없이 '후쿠오카 농원을 아시는 지'를 기사님께 물어보았는데, 2-3분도 채 걸리지 않아 커다란 간판이 걸린 돼지고기 요리집 옆으로 택시가 숙 미끄러져갔습니다. 얼떨결에 내리긴 했는데, 생각했던 것 보다 너무 가까웠기 때문인지 오히려 낯설고 심지어는 약간 두렵기까지도 했습니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피해 건물 처마 아래로 몸을 숨기고 나서야 "福剛自然農" 이라 적힌 나무 간판이 보였던 것 같습니다. 제대로 찾아온 건 맞는 지, 이곳이 정말 마사노부 선생의 농원이 맞는 지 - '농원'이라 하기엔 너무 대로변이었거든요 - 찰나에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어쨌든 간판을 봐도 그렇고 쌓여있는 상자에도 분명 '福剛自然農園'이라고 찍혀있으니 맞기는 맞겠다 싶었지요. 슬레이트인지 강판인지 깔끔한 편인 작업장 입구에서 쭈볏거리며 '실례합니다'하고 부르자 저쪽에서 누군가 한 명이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점심 식사 중인 듯 했는데, 한눈에 봐도 농부의 차림을 한 하마다 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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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큰 키에 장화를 신고 모자를 구겨 쓴 하마다 씨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마냥 어둡게 보이는 건물로  앞장 서 들어가더니 이곳에서 묵으면 된다고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커봐야 열 평 남짓될까 싶은 공간은 실내도 참 어두웠습니다. 현관 옆으로 지금은 아무도 안쓸 것 같은 개수대가 있고 상자와 책, 잡동사니들이 여기저기 있었습니다. 다다미가 깔린 방에는 대학생 때 가본 엠티촌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이불 더미가 쌓여있었고, 낯선 먼지가 자욱할 것 같은 기분마저도 들었습니다. 방 옆에는 바로 철길이 난 듯, 시시때때 굉음을 내며 기차가 스쳐갔습니다. 끈을 당기면 깜빡깜빡하며 켜지는 동그란 유에프오 같은 형광등이 천정에 달려있었습니다. 조금 스산하고, 추웠습니다.

스탭들이 식사를 하는 공간도 어두운 편이었습니다. 불이 켜져있었지만, 제법 오래된 부엌과 검게 때가 낀 찬장, 조리도구 그리고 식탁 탓이었을 겁니다. 식탁 위에는 처음 보는 낯선 감귤류가 있었습니다. 곰보처럼 여기저기 점이 박힌 레몬도 있고, 유자인지 하귤인지 알 수 없는 큼지막한 귤도 있고, 자르면 피 같은 즙이 나오는 타로코도 있었습니다. 길죽한 벤치 모양 나무 의자 옆에는 무, 유채, 쪽파, 양파 같은 채소들이 담긴 콘테이너 박스가 있었습니다. 아무튼 그 어디에도 마냥 예뻐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부엌 한 켠 벽에는 이런 글이 씌여있었습니다.

한 방울의 물에도 하늘과 땅의 은총이 담겨 있습니다.

한 알의 쌀에도 만 명의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하마다 씨는 지금은 비가 오니 밖에서는 별달리 작업이 없어 표고버섯 종균을 나무 토막에 심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조금 맥이 빠지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지요. 그리고 얼마 후, 히로키 씨가 왔습니다.

히로키 씨는 농원의 실질적인 리더이자 마사노부 선생의 친 손자입니다. 싱글싱글한 표정이었지만 실제로는 내성적인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로변에 농장이 있을리가 없다 싶어서 과수원이 어느 쪽인지  직접 가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히로키 씨는 약간 주저하더니, 비가 오는데 그냥 보기만 해도 괜찮다면요, 하면서도 차에 시동을 걸었습니다. 거름 냄새 나는 경차를 타고 좁을 마을 길을 달리는데 온 들판에 유채꽃이 하늘거리며 반가워 하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길은 점점 더 좁아지고 오르막길을 올라 산으로 향하는데 히로키 씨가 갑자기 차를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저게 라임 나무에요. 그리고 차에서 내려 이파리 하나를 똑 따서 건네주었는데, 와.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아름다운 향이 나던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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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가지들이 차 옆구리를 슥슥 긁어대고, 구불구불한 길을 아슬아슬 올라갈수록 골짜기에 고인 구름이 안개로 변해갔습니다. 그제서야, 정말 산 속으로 가나봐,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궂은 날씨에 이 험한 길로 '견학'을 청한 것이 괜스레 미안해졌습니다. 그렇게 제법 산길을 올라간 뒤 우리는 나지막히 동네가 내려다 보이는 산의 중턱 쯤에 차를 멈춰세웠습니다. 온갖 풀들이 자란 이 곳은 마을이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는데 날만 좋으면 꽤 볕바른 곳일테지, 싶었습니다. 이미 열매를 모두 흘려보낸 온주밀감 나무에는 풀빛 이끼가 잔뜩 끼어있었습니다. 히로키 씨는 그 나무들을 가리키며, 마사노부상 때부터 심겨져 있었던 나무, 라고 했습니다. (히로키 씨는 할아버지를 '마사노부 상'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은 그 나무들은 생각보다 빽빽하게 심겨져 있었습니다. 아래로 처진 가지들도 별달리 손댄 것 같지 않았는데, 하긴 햇볕을 가릴 거라곤 없는 산의 남쪽 경사면에 심겨져 있었으니까요. 히로키 상은, 여기서는 물이 빠지기도 쉽다, 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빽빽하게 나무를 심은 이유에 대해서는, 현실적인 수확량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요, 라고도 말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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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우리는 숲 속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습니다. 삼나무와 벚나무, 아카시아 나무들이 스쳐 지났습니다. 그 중에는 마사노부 선생이 말했던 그 '모리시마 아카시아' 도 있었을 것입니다. 히로키 씨는, 아카시아는 빨리 자라고, 정해진 수명이 지나서 스러지면 주변에 '자식' 나무들이 다시 자란다고 말했습니다. (마사노부 선생은 아카시아를 군데 군데 심어서 여러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를테면 병해충의 문제라든가 뿌리의 양분 공급의 문제 등이지요.) 그리고 그 숲 속 군데군데 감귤 나무들이 심겨져 있었습니다. 나는 산 속에 있는 과수원을 과수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무가 산에 있고, 산이 나무를 품고 있어서, 과수원이라는 단어가 왠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분명 이 나무들은 산의 온갖 동물과 미생물 그리고 다른 나무들과 수 없이 많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살고있을 테지요. 그러니 여기는 야생의 '과일 학교' 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년 내내 야외 수업을 하는 그런 학교 말입니다. 어두운 나무 그늘 아래로 표고버섯을 키우는 나무 토막들도 보였습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것들을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재배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겁니다. 더이상 아카시아 나무를 심지 못하고 유기질 비료를 써야하는 것도, 현실입니다.

농원에서 만난 료라는 친구는 밝은 표정의 필리핀계 일본인이었습니다. 현역인지 전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곧 친구의 부름으로 도쿄에서 녹음을 할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우연히 마주친 나에게 심심하면 기타도 치고 놀라고 하며 작은 사이즈의 기타 한 대를 건네 주었습니다. 저녁 당번인 하가 씨는 제주도는 어떤 곳이냐, 어떤 밀감이 나느냐 등 궁금한 것이 많았습니다. 저녁은 현미밥과 돼지고기 볶음, 마요네즈가 듬뿍 뒤섞인 '사라다', 그리고 인스턴트 '기무치' 등이었습니다. 말 없이 차를 권하던 가와이 씨는 생각보다 엄청난 대식가였습니다. 하마다 씨는 커다란 댓병 사케를 들고 혼자 홀짝거렸는데 꽤 마시지 않았을까도 싶었지만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식탁 위에 놓여있는 방명록을 펼치니 일본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의 메시지가 적혀있었습니다. 세키구치 씨는, 저녁에 잠시 회의가 있을 예정이며 정기적으로 갖는 세미나가 있을 터인데 함께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회의란, 곧 있을 농원의 꽃구경 행사에 대한 회의였고 세미나란, 마사노부의 책을 함께 읽고 얘기를 나누는 그런 자리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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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델링을 주로 하는 건축가 요코씨는 마사노무 선생의 책 '無'를 들고 세미나에 왔습니다. 요코 씨는 마크로비오틱스 요리법에 관심이 많았는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관행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이곳에서 마사노부 선생은 그냥 '이상한 사람' 으로 여겨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도 고향에서 그렇지 않았느냐, 고 하며 하하호호 웃는 것이었습니다. 마사노부 선생의 책이 20 여개 국이 넘는 나라에 소개되어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동안, 정작 그의 후손들이 키워내는 작물들은 고향에서는 팔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농원에서 십분 거리에 있는 마트에도 후쿠오카 농원의 감귤은 보이지 않았거든요. 다만 멀리서라도 이 못생긴 과채의 아름다움을 알아주는 이들이 있으니 농원 사람들은 묵묵히 과일을 키우고 수확을 하고 상자에 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세키구치상은, 아주 조심스럽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란 말을 덧붙이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농업은 자본주의와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 말 한 마디가 여행 내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농사는 자본주의와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농원에서 맞은 생일 밤 비가 부슬부슬 내렸습니다. 한국의 어머니는, 내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라고 문자를 보내주었습니다. 나는 문자가 찍힌 핸드폰 창을 잠시 쓰다듬다 잠이 들었습니다.

이튿날부터는 일을 도왔습니다. 역시나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실내에서 하는 작업들이었는데, 지금 한창인 듯한 아마나쓰(甘夏橘)는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환영받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껍질도 두껍고, 맛은 시고, 씨앗도 박혀있고, 속껍질도 벗겨내고 먹어야 하니까요. 레몬은, 한 마디로 성한 것이 없었는데 원래 레몬 나무에는 가시가 많아서 상처가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고들 했습니다. 그렇다면 마트에서 팔리는 그 노랗고 반질반질한 레몬들은 다 어떻게 '만들어 진' 건가도 싶었지요. 급히 서두는 사람도 없고 재촉하는 사람도 없이 찬찬하고 능숙하게 다들 일을 해 나갔습니다. 휴식 시간에는 마사노부 선생의 아들인 마사토 씨와 부인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차와 간식을 먹으며 쉬는 자리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기타를 건네주면서 노래 한 곡을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무슨 노래를 해야할 지 잠시 고민을 하다가, 그만 나도 모르게 '강'을 부르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한글을 알아듣지도 못할테고 그러니 노래가 더욱 지루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그냥 처음 생각난 곡이었거든요. 노래를 마치자 다들 박수를 쳐주긴 해서, 다행이다, 생각은 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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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직접 해주기로 한 터라 마트에서 이것저것 식재료를 고르고 있는데 하마다 씨가 와서, 다른 농원을 구경하고 싶으면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처음 보여준 곳은 노지에서 키위를 키우는 산 속 과수원이었습니다. 키위 덩쿨 아래에는 갓, 유채, 양배추 등 온갖 채소들이 함께 자라고 있었습니다. 하마다 씨는, 처음 '할아버지' - 하마다 씨는 마사노부 선생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 가 터를 잡았던 삼나무 숲 속으로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그곳에는 몇 십년 전 당시 마사노부 선생을 찾아 온 젊은이들이 생활했다는 육각 지붕의 집터가 있었습니다. 아주 길고 커다란 스기목으로 직접 지은 건물은 지금은 바닥도 내려앉고 벽채도 뼈대만 남은 모습이었습니다. 몇 주 후에 있을 꽃놀이 행사 때 모두 이곳으로 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마다 씨는 마사노부 선생이 살았던 집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밖으로 잡목들이 무성해서 텅 빈 집이 더욱 작고 쓸쓸해 보였습니다. 그 옆으로은 산머위가 잔뜩 자라고 있었는데 농원에서는 이 머위도 캐서 팔고 있다고 했습니다. 

산을 내려와서 채소를 키우는 밭으로 갔습니다. 눈어림으로 봤을 때 200 평이 될까말까한, 그리 크지 않은 밭이었는데, 지금 돌이켜봐도 무슨 작물이 자라고 있었는지는 이상하게도 기억이 나지를 않네요. 아마도 나는 땅에 깔려있던 검은 멀칭 비닐에 더 눈이 갔던 모양입니다. 마사노부 선생이 책에 적었던 볏단 멀칭이 아니라, 한국의 어느 농촌에서도 볼 수 있는 보통의 검은 폴리프로필렌 멀칭이었거든요. 논에는 지금은 철이 철인 만큼 벼대신 밀이 심겨져 있었습니다. 벼와 밀을 여전히 교작하는 지에 대한 하마다 씨의 답변은 정확하지는 않았는데, 트랙터로 밭을 간다는 얘기는 분명히 해주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무경운 원칙은 지금은 폐기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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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마다 씨가 어떻게 이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 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에히메 옆 고치현 출신인데, 우연한 기회로 농원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돌아갔다가 다시 와서 일을 하게 되었고... 그런 연이 이어져서 스탭으로 일한지 16 년 째라고 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러게 왜 내가 여기서 일을 하게 되었을까요, 에 대해서 하마다 씨도 딱히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무책임하게 말하자면, '어쩌다보니' 일테지만, 일일히 설명하기 힘든 그 이상의 어떤 '부름'이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마다 씨는 에히메의 현실도 우리나라와 크게 다를 바 없어서 힘들지만 조상들에게 물려 받은 땅을 버리지 못해 일구고 사는 것이 농가의 현실이 아니겠냐고 했습니다. 나는 결국 농부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땅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아닐까, 땅의 부름이 곧 천직(calling)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농사란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좋든 싫든 피할 수 없는 그 무언가의 부름을 물려받은 업이겠구나 생각이 들어, 괜스레 나는 쓸쓸해졌습니다.

며칠을 묵고 농원을 떠나는 날 농원의 사람들은 몇 가지 선물을 챙겨주었습니다. 아마나쓰 주스 한 병과 잼 두 통, 그리고 분땅(文但) 감귤 등등이었는데, 우리 나라에는 없는 것들이라 한국의 친구들과 나눠먹어야겠다 마음을 먹으니 신이 났습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같이 사진을 찍고 하가 씨는 혹시라도 마쓰야마에서 공연을 하게된다면 꼭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두고두고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요코상은 도고까지 와서 기어이 점심을 사주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아내와 이름이 같다는(!) 무라카미 요코상은, 영국에서 건축을 공부하던 중 어머니가 위독해져서 일본으로 돌아온 이후 심하게 우울증을 앓던 차에 마사노부의 책과 농원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람들이 말도 안되는 돈을 들여 새로 집을 짓기만 하는 것이 싫어서 오래된 집을 리모델링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오카야마가 고향인 아버지와 함께 사는 요코씨는 오카야마에서 유명한 홍송으로 아버지의 집을 고쳐드렸는데, 아버지는 맨발로 바닥을 걸을 때마다 어렸을 적 생각이 나는 지 좋아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작은 카페를 하나 열어서 지역의 친환경 재료로 마크로비오틱 요리를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학대당하는 아이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고 싶어하는 친구와 함께 공간을 꾸미고도 싶다고 했습니다. 기분 좋은 꿈을 꾸며 사는 것이 정말 좋지 않냐는 그녀는 띠 동갑 누나뻘이지만 마냥 앳된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친구를 만나게 되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우리는 메일 주소를 교환하고 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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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코에는 벌써 목련꽃이 환하게 맺혀있었습니다. 가지가 축 처진 벚나무에도 분홍 꽃망울이 터졌고 나비들은 온 동네를 분주하게 날아다녔습니다. 아주 오래된 숙소에 짐을 풀었는데 그곳에는 티비 대신 시디플레이어와 시디 몇 장이 있었습니다. 그만그만한 스탠더드 팝 앨범들 사이로 일본 가수 치에 아야도의 시디가 눈에 띄여 자켓을 뒤적이다 'get into my life'라는 노래 가사를 보았습니다. 그날은 우연이었겠지만, 세상이 봄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날, 춘분이었습니다.

언젠가 내 아들이 물었지. 난 왜 엄마 아들이야? 

조금 놀라긴 했지만 나는 말했습니다.

하느님이 그렇게 정해주신 거야.

그런데 아들은 또, 왜 하느님이 엄마를 내 엄마로 만들어주셨어, 하고 물었지.

그 말을 듣고 나는 잠깐 멈춰 생각했어.

아들아. 난 이렇게 계속 살아간단다. 포기하지 않고 살다보니 나는 네 엄마가 되어있구나.

그리고 이렇게 된 나는 네가 없이는 살 수 없구나. 우리 둘은 하나로 묶여있구나.

내 삶으로 오너라. 너는 내 삶으로 들어왔구나. 아주 순리대로, 아주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왔구나. 아주 순리대로.

누가 원한 걸까. 아마 우리 둘 다 였겠지.

이제 나는 아들에게 말해줄 수 있을 겁니다.

살아내거라. 아픔을 덜 수 있도록. 

내가 네 곁을 떠나고 없어도, 네 마음 속에 살아있을게.

너는 네가 원하는 걸 알게 되겠지. 하나 더 말해줄까.

너도 네 스타일의 사람이 생길 거야, 분명해.

문득 나는 생각났습니다. 내가 아주 작은 소녀였을 때,

나도 나의 엄마에게 똑같이 물었었다는 걸.

우리 엄마가 나에게 뭐라고 대답했는지 잘 기억나진 않지만,

하지만 이제 나의 엄마가 내 마음 속에서 보이는 걸요.

마쓰야마에서 가장 큰 쇼핑 거리 오카이도를 지나는데, 어느 입간판에서 낯익은 얼굴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기적의 사과'로 유명해진 키무라 아키노리 씨의 사진이었습니다. 몇 년 전 그도 후쿠오카 농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는 하마다 씨의 얘기가 생각났습니다. 아키노리 씨는 생사의 고비를 넘기는 노력 끝에 사과 자연재배에 최초로 성공한 분입니다. 한 손에 사과를 들고 활짝 웃고 있는 그는, 직접 키운 사과로 만들었다는 화장품의 광고 모델이 된 모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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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펼친 신문에서 몬산토의 유명한 제초제인 라운드업이 '거의 확실한 발암성' 물질이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41% 글리코포세이트 성분이라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아무개 제초제와도 똑같습니다. 함께 밭 일을 하던 사람들은 맨손으로 이 약을 따르고 마스크도 없이 밭에 뿌리곤 했지요. 그 선연하게 파랗고 끈적한 액체를 처음 만들어 세계적인 히트를 친 몬산토는 여전히 이런 WHO의 보고에 이의를 걸고 있습니다. 농업교육시간에도, 제초제는 땅과 정전기적으로 결합하니 토양 중에서 안전하다는 이야기만을 강조했더랬습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 제초제의 병에는 '저독성 농약'이라고 씌여있었습니다. '저독성'이란 말은 왠지 농부들을 안심시키기에 좋은 단어긴 하겠지만, 기사를 읽고 나니 나는 자꾸 세키구치 씨의 자뭇 진지했던 목소리가 생각나는 것이었습니다. 아키노리 씨의 환하게 웃는 사진과 겹쳐져서 말이지요. '이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아무래도 농사는 자본주의와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 생일 축하와 선물. 모두 고맙습니다. 기쁘게 잘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