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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3/15

2/26

대성 형님이 집으로 오셨다. 집 구경을 시켜드리고 차를 마시면서 농사 얘기를 했다. 귤밭 가보니까 전정할 게 엄청나던데, 하신다. 작년에 아무도 관리를 안 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럴 것이다. 밴드에서 건반을 친다는 딸 해미에게 전해줄 키보드를 챙겨 드렸다. 처음 음악을 시작할 때, 모 인디레이블과 계약이란 걸 하고서 계약금 조로 받았던 건반이다. 연이란 건 다하면 붙드는 게 아닌 법이니, 이제 다른 누군가를 위해 소리를 내주길.

 

밤이 되고, 헤드폰을 쓴 채 한 시간 넘게 바다를 걸었다. 이런 추운 날, 헤드폰은 귀마개도 되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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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겨울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귤밭에 갔다. 여기저기서 흙을 조금씩 모아 담았다. 밭 어딘가데에서 후두둑, 꿩 한 마리가 날아갔다. 땅은 왠지 모르게 메마른 듯, 냄새도 없고 벌레도 보이지 않는다. 흙을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농업기술센터에 토양검정을 맡기도 돌아왔다. 한 달 쯤 후에 집으로 결과서를 보내준다고 했다.

밭으로 가는 아스팔트 길 위에 붉은 동백꽃이 떨어져 있었다. 차를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몹시 부는 밤이었다. 나는 어제처럼 바다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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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본과 아르헨티나에서 CD를 여러 장 주문했다. 내가 아직도 CD를 사서 음악을 듣는 이유는 음질 때문도 아니고 음반을 갖고 싶은 마음 때문도 아니다. 나는 아직도 사람들이 내 음반을 - 이왕이면 CD의 형태로 - 사서 음악을 들어주길 바라는 뮤지션이다. 그러니 그런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나도 언제까지나 CD를 사서 음악을 들을 것이다. 

기타를 잡고 있다보면 혼자 집을 짓는 것 같을 때가 있다. 

 

3/1

오래 걷다 돌아오는 길에 동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말했다. 사람이란 시대 앞에도 사회 앞에도 참 무력하기만 하지. 동네 한 길을 지나 바람이 거센 집 앞에서도 한참을 얘기하다, 얼얼한 얼굴을 싸매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래. 그럴수록 우린 또 저항해야하는 거겠지. 자유의 반대편에 서 있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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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에 봄 멸치가 났다. 피조개를 사 와서 손질을 하고 나니 손에서 외할머니의 냄새가 난다. 헤베, 운간초, 눈꽃을 사와 심었다.

오늘 밤은 유난히 고요했다. 소리도 흐름도 없는 정적이었다. 왠일인지 마냥 또 밤길을 걷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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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일어난 아침, 갈매기 소리가 크다. 올해 첫 농사일을하러 새벽 길을 나섰다. 

밭에 도착해서 일을 시작하기 전, 마음 속으로 빌었다. 나무와 제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일하고 싶습니다. 벌레도, 잡초도, 새도, 더 많은 생명체가 여기에 살면 좋겠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하나하나 나무를 보니 작년에는 아예 전지전정이라곤 한 안 듯 싶다. 얼핏보면 무성해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수형도 엉망일뿐더러, 제대로 자란 가지는 없고 온통 웃자란 순이다. 전정에는 나름대로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하나. 아래로 처진 가지는 무조건 쳐낸다. 열매가 달릴지는 몰라도 부실한 것들이 달리기 때문이다. 그런 열매를 매달고 축 처진 가지란, 농부도 나무도 힘들게 할 뿐이다. 둘. 키 이상 웃자란 가지와 순은 무조건 자른다. 가지를 잡아 당기면서 열매를 따고 싶지는 않다. 셋. 나무 사이의 공간 그리고 나무 안의 공간은 넉넉히 확보한다. 적절한 '거리'가 없다는 건, 나무나 동물이나 인간에게나 스트레스다. 나무 속은 비어야 바람도 통하고 볕도 든다.게다가 나무 안에 열매가 달려본들, 따기도 어렵고 부실하다. 그러니 소용없다.

집에 오니 주문한 시디들이 벌써 도착했다. 한동안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것 같은 기분은 지금이나 고등학교 때나 똑같다. 왠지 나에게 고맙다. 사실 이번에 CD를 주문할 때, 꽃은 말이 없다.의 일본판도 주문을 했더랬다. 한글판과 같은 듯 다른 앨범일 거라 예상했는데 속지를 펼치니 Watanabe Toru라는 분이 쓴 앨범평이 있었다. 그간 들어온 어떤 말보다 나에겐 가장 아름답고 고마운 코멘트였다. 

(...) 나에게 루시드폴의 음악은,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木漏れ日) 같습니다. 한국어로 '木漏れ日'에 해당하는 단어가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 꽃은 말이 없다.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따뜻한 햇살이 느껴지고 어린 나무의 향기가 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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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 2일 째. 맞은편 밭 주인을 우연히 만났다. 인사를 드리고 물을 나눠주실 수 있냐고 부탁을 드렸는데 의외로 흔쾌히 허락을 하셨다. 밭 한 가운데에 누군가가 버리고 간 1000L짜리 물통이 있다. 크기는 적당한데 자세히 보니 금이 가 있다. 점심을 먹고 읍사무소에 가서 치워주십사 부탁을 하고 돌아왔다. 게이트볼장을 개조한 임시 읍사무소 건물이 맘에 든다. 널찍하게 통한 공간에 무엇보다 차가운 형광등이 없어서 그런가보다. 

일 하는 중간중간 차 안에서Quiet Corner: A Collection of Sensitive Music를 들었다. 이 앨범은, 서른 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Radka Toneff의 노래로 시작한다. 그리고 가수로서의 삶을 접은지 35년 만에 두 번째 앨범을 낸 Vanshiti Bunyan의 노래로 끝난다. 비스듬히 차 시트를 젖히고 Diana Panton의 'Moon River'를 들었다. 바람이 귤  이파리를 사그락대고, 먼 곳 삼나무 꼭지를 흔들거렸다. 

 

3/5

전정 3일 째. 맞은 편 밭 주인께서 한 말씀 하신다. 아유, 그러면 귤 안 열려. 올해 엄청 열릴텐데. 가지를 그렇게 많이 치면 안 열려. 안 열려. 별 대답 없이 그저 넘기긴 했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 괜스레 손놀림이 더뎌진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온통 웃자란 순 뿐인데다가, 이렇게 해거리가 심한 나무들을 그냥 두면, 올해는 그렇다치고 내년에는 어떻게 하나

그건 그렇고, 봄 밭에는 푸르스름한 봄까치꽃이 피기 시작했다. 집에 오니, 니엘이 보낸 앨범과 립밤이 도착해 있다.

봄 공연 장소와 일자가 거의 확정되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이제 거의 확정입니다. 5월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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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 4일 째. 오전 일을 하는데 비가 후두둑 내린다. 잠시 일을 멈추고 가지 파쇄 업체를 알아보았다. 두 명이 와서 일을 하는데 점심과 간식은 빼고를 강조하셨어 35만원에서 40만원 정도를 받는다 하셨다. 하루 일당으로 받은 돈이 8, 9만원이었으니, 기계 사용료에 기름값도 들겠다, 그럴만도 하겠다 싶긴 하다. 나야 아직 안전공제에 가입도 안 되어 있고, 트럭도 없으니 기술센터에서 파쇄기를 빌리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게다가 처음이니 누군가를 부르긴 해야할텐데.

HSP (Highly Sensitive Person)에 대한 글을 보았다. 내용에는 동의하는 부분도 아닌 부분도 있지만, 생물학적으로 '감각기관이 더 발달한 사람'이라는 정의가 신선하다. 세상의 어떤 사람들은 'AG (Adventure Gene)'을 갖고 있다고 한다. 잘 닦아놓은 넓은 길을 걷는 것보다, 거칠고 좁은 나만의 길을 걸어가려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HSP with AG'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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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장 꽃가게엔 꽃도 많아지고, 꽃구경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눈꽃, 도라지꽃을 닮은 향기별꽃, 버베나, 프리지아를 마당에 심었다. 바싹 말라있던 뜨락의 앵두나무에도, 작약에도, 어느새 꽃눈이 송글송글하다.

용준씨와 친구가 집에 왔다. 장에서 가자미와 백조기를 사와서 회를 떠 주었다. 맛은 그리 특별하지 않지만 조기회는 귀한 것이니.

 

3/8

삼나무 숲길을 걸었다. 겨우내 마른 수국 꽃잎이 금빛으로 물들어있다. 복된 죽음이란 게 만일 있다면, 이런 걸지도 모르겠다. 

기타 수리가 다 되었다는 문자를 받고 달려 갔다. 15년만에 픽업이 바뀐 것이다. 저녁에는 친구들에게 봄멸치구이와 피조개 파스타, 햇모자반 샐러드를 해주었다. 밤늦게까지 오랜만에 많이 마시고, 많이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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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아침 겸 점심으로 성대국을 먹었다. 식당에서 나오는 길에, 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밭에 가봤는데, 그러면 귤 안 달려, 올해 많이 달릴 건데, 그러면 귤 안 달려, 라고 거듭 말씀하신다. 나는 역시나, 네, 네 알겠습니다, 할 뿐이었다. 3월 말에 방제를 해야 하니, 안 쓰는 물통 하나만 가져다 주십사 형님께 부탁을 드렸다. 

 

3/10

곧 어머니도 오시고 해서, 그리고 Dog TV가 무척 궁금하여. 티비를 연결했다. 개국 기념으로(!) 다큐 한 편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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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 5일 째. 다른 파쇄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천 평 기준인데, 일단은 직접 봐야 알 것 같다고 한다. "1/2 간벌하는 밭은 아니죠?" 하고 묻는데, 지금 우리 밭의 상황을 보아하니 어쩌면 간벌과 전정 중간 쯤 인가 싶어서 괜히 혼자 뜨끔했다. 점심을 먹고 식당 문을 나서는데 세레스 한 대가 눈에 들어온다. 이 시골에서 외제차를 보긴 어렵지만, 적재중량을 훌쩍 넘긴 양배추며 무며 양파를 가득 실은 세레스는 흔하고 흔하다. 허리가 활처럼 휜 세레스를 보니, 굽은 허리로 평생 일만 하시는 이곳 할머니들을 보는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 세레스(Ceres)란 농사의 여신, 로마의 케레스로구나.

얼추 절반 넘게 전정이 끝났다. 전정 가위의 날이 날카롭게 벼려져있어서 손조심해야겠다.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마을 윗길로 들어섰는데, 학교 앞에서 연수, 은희, 수호를 만났다. 다들 반가워하며 인사를 하다가, 3 학년은 재밌니, 물어보니, 아니요, 하며 은희가 입을 삐죽거렸다.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에요. 아이들이 준 쌀과자 하나를 물고 어딘지 아쉽게 집으로 향하는데, 아이들과 놀던 때가 너무나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3/12

장에서는 할머니들이 쑥이며 민들레며 들에서 캐온 봄나물을 팔고, 어물전에는 은빛 꽃멸치도 났다. 햇 쑥과 커다란 도다리 한 마리를 사고, 자그마한 문어 한 마리를 사고, 외할머니는 항상 말려서 쪄주시던 양태 한 마리를 샀다. 꽃가게에서 연푸른 프리지아를 처음 보았다. 하지만, 화사한 꽃을 심고 싶어서 마가레트 세 포트를 들고 돌아왔다.

여자 가수에게 줄 곡을 연주하기 위해 8현 기타를 바리톤 Bb 튜닝으로 바꿨다. 처음에는 음정이 불안했는데, 차츰 줄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난생 처음 듣는 독특한 소리가 난다. 이 기타로 연습을 하다가 일반 기타를 치면 손가락이 날아갈 것 같이 쉽다. 동률이 선물을 보내왔다. 

 

3/13

전정 6일 째. 밭으로 가는 길에 옆 집 할머니를 만나서 읍내 보건소로 모셔다 드렸다. 차로는 금방이지만 버스 정류장에선 꽤 먼 거리라 걸어다니기 힘드실테다. 할머니를 내려다 드리고 길을 꺾어들어 산록도로로 올라가는데, 돼지들을 잔뜩 실은 트럭 한 대가 교차로를 가로질러갔다. 차가운 금속성 짐칸 사이 언뜻 언뜻 분홍빛 살갗이 예쁘고 슬퍼보였다. 그리고 나는 난데없이 미야자와 겐지를 떠올렸다. 37 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가, 만일 채식을 고집하지 않았더라면 더 오래 살지는 않았을까. 그건 그렇고 아침부터 어디로들 실려 가는 걸까.

점심을 먹은 식당 쪽밭에 살갈퀴와 광대나물 꽃이 피어있다. 일년만에 낯익은 분홍빛 꽃을 보니, 아 여기서 일년을 살아냈구나, 생각이 든다. 작년의 봄도 낯선만큼 아름다웠지. 올해도 벌써 어디에나 봄이 찬란하구나. 돌아오는 길에 이름 모를 새 한 마리를 보았다. 노란 부리와 노란 다리다. 이름을 알고 싶은데, 알 길이 없다. 읍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농정 지원사업 결과를 물어보았고, 지원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다음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대로 분무기의 견적서를 다시 받고 교부금 신청 통장을 만들어야 한다. 책읽는곰에서 책을 보내왔다. 그런데 아이들과 멀어지고나니 동화책을 보아도 괜시리 기분이 시무룩해지고, 한 마디로 예전 같지가 않다.

선휴씨가 선물을 보냈다. 에펜도르프 튜브에 설탕이 들어있고, 유리 바이알에 커피가 들어있다. 연구실 생각이 났고, 결국 간밤에는 실험실 꿈을 꾸었다. 

 

3/14

전정 7일 째. 오후 1시가 넘으니 밭 서쪽으로 사스레피나무가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쪽 나무들은 하루의 절반 이상을 음지에서 보내야 하는 것이다. 가지를 쳐 내도 소용이 없고 아예 베어내지 않는 한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처음 나무를 심은 사람들은 짐작도 못했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이젠 방풍림들이 애물단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장담할 수 있는 관계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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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간의 작업 끝에 750 평 전정을 갈무리했다. 흙바닥을 새파랗게 뒤덮은 나뭇잎과 가지를 내려다 보았다. 내년 이맘 때쯤엔 이곳의 모든 것들이 더 행복하면 좋겠다. 나무도, 땅도, 벌레도, 새도, 그리고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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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할머니께서 내 방으로 들어오셨다. 일년이 지났구나, 싶은 것이, 처음엔 30%도 알아듣지 못했던 할머니의 사투리를 이젠 얼추 60%는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나는 오늘 할머니께서 노래를 하는 가수였다는 걸 처음 알았고, 그제서야 왜 우리집에 오셔서 가끔 노래를 부르셨는지, 정작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내가 음악하는 사람이란 걸 어떻게 그리 금세 눈치채셨는지, 알 것만 같았다. 이것저것 물어보니 할머니가 30대였던 시절 그러니까 50년도 전 노래를 한다 ...달빛은 창틈으로 스며들고, 사랑은 마음으로 새어들고... 일주일에 두 번은 소리를 하러 갔고, 외국 사람들 앞에서 한 번 노래를 하러 가면 그 때 돈으로 4 만원씩을 받았는데, 할아버지의 반대로 더 할 수가 없었다고, 심지어 녹음도 했었다고 말씀하시는 87세의 할머니의 말씀을, 나는 여전히 절반은 알아듣고 절반을 알아들을 수 없고, 절반은 진짜 같은데 절반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그 이야기들을 할머니는 잔뜩 풀어놓고, 나는 글자 한 자도 못 보지만 노래하는 사람은 그런 게 필요 없다고, 눈치껏, 그리고 마음으로만 부르면 된다고, 줄지어선 기타와 창밖 바다를 번갈아 보며 여기가 얼마나 좋으냐 하시는, 글자 한자 모른다는 우리 옆집 할머니의 이름을, 나는 드디어 일년만에 오늘 처음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