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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갈리에게서 메일이 왔다. 늦어서 미안하다며 인터뷰를 보내왔다. 빽빽하고 꼼꼼하게 적어 온 'flying dutchman' 토마스와 달리, 답변이 온통 운문체다. 얼마전 정범씨가 LDC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했는데, 혹시 만났느냐고 답메일을 보냈다. 주말 안에 인터뷰를 다 정리해야겠다. 비자 열매를 씹으니 입 안에서 편백나무 향이 난다. 

 

 

엘렌 그리모와 유럽 실내 관현악단이 연주한 라벨 피아노 협주곡을 들었다. 2 악장, '아주 천천히 (adagio assai)'.  엘렌도, 지휘자 블라디미르도, 단원들도, 손짓도 표정도 눈길도, 모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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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을 모두 갈무리하고 돌아왔다. 마르고 무른 귤, 새들이 쫀 귤들은 모두 땅으로 돌려보내고 성한 귤들을 모두 상자에 담았다. 썩을 것들은 이미 썩었다. 버텨낸 것들은 마를뿐, 썩지를 않는다. 나뭇 가지에 주황색의 흔적이 사라질무렵, 마음으로 말했다. 한 해 동안 고마웠어. 행복했다. 니들이 내 선생님이었구나.

농사 첫 해 수확량은 1.7 톤으로 마무리했다. 엘렌 그리모의 연주를 들으며 차 안에서 점심을 먹는데, 하얗게 죽은 삼나무 하나가 30도 정도로 기울어진 채 흔들흔들거린다. 음악이 풍경을 달리 보이게 하고, 풍경이 음악을 달리 들리게 한다. 마무리된 번역본을 출판사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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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경영체 등록을 했다. 튤립 구근 세 뿌리를 사서 돌아왔다. 하루종일 라벨을 들었다. 엘렌 그리모의 dvd와 재주소년의 새 앨범을 주문했다. 다음 주에 있을 EM 농업교육을 신청했다. 오랜만에 와인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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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에 갔더니 오늘도 리틀야구단이 열심히 연습을 하고 있었다. 공과 원반으로 보현이와 놀아주었다. 얼마전엔 어떤 아저씨가 와서 물었지. "저... 혹시 개 훈련 시키는 분이세요?" 저 음악하는 사람이거든요. 아이들이 글러브를 한 줄로 벗어 놓고 준비 운동을 한다. 모양도 색도 똑같은 글러브가 하나도 없다. 파란 글러브. 노란 글러브. 큰 글러보. 작은 글러브. 야수용 글러브. 포수용 미트. 몸집도 손 모양도 다 다를테고, 각자 아이들의 손에 맞게 하나 같이 길들여졌겠지. 아이들마다 좋아하는 것도 다르고 싫어하는 것도 다른 것처럼. 각자의 행복이 다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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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비가 온다. 비를 맞으며 숲을 걸었다. 한기가 스며들 때까지 빗속을 걸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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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 할아버지에게서 문자가 왔다. '사랑만이 천국에 이르는 통로다' 라고 문자를 보내셨다. 계속 할아버지의 문자를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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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님과 차를 한 잔 했다. 영화용 필름을 10 롤, 향초를 선물로 가져다 주셨다. 전시회 얘기를 잠시 나누다가, 카메라 얘기로 빠졌다. 그날 저녁 필름 카메라 하나를 주문했다. 인터뷰 글 3 개를 겨우 마무리해서 미술관에 넘겼다. 

(...)나에게 음악이란, 내가 '바로 (the zone)'이라 부르는 잠재의식의 세계로 다다를 있게 해주는 하나의 방식이에요. 내가 ' ' 있을 , 온갖 생각들이 자유롭게 흘러다니면서 같이 연주하는 사람들과 강한 유대감으로 아이디어를 주고 받을 있게 돼요. 팀이 이런 상태로 연주를 하게 되면, 사람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걸 금세 알아차리죠. 그리고 리스너들이 어떤 종류이든 비로소 감정을 느낄 있게 되는 거고요.

Thomas Baggerman

 

(...)듣자. 듣자. 듣자. 모든 음악을 들어봅시다. 길은 각자가 찾고요. 따라합시다. 그러고 나서는, 만들어냅시다. 기타든 피아노든 드럼이든, 무슨 악기든 찾아봅시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제일입니다.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사랑합시다.

Ghali Hade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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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바다에 나가 돌을 주웠다. 바다의 햇살 아래 바다의 바람을 맞으며 쓸만한 돌을 주웠다. 그 익숙한 햇살과 소리와 냄새와 바다 생물들. 모든 것들이 어린 시절 나의 바다를 떠올리게 했다. 밤이 되고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장에서 톳을 사와 밥에 넣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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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으로 차를 몰고 가는데 문득 요즘 택시를 타는 것이 왜그리 힘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곳에서 나는 시속 60 킬로미터 이상으로 차를 몰 일이 없다. 밭에 도착해 형님 구역에서 덜 마른 것들만 골라 상자에 담았다. 몇 달을 내버려두다시피한 퇴비도 정리하고, 빼먹고 드문드문 달려있는 열매도 마저 따주었다. 밭 한구석에 한라봉 나무가 두어 그루 있었다. 아직 익지 않은 것 같다. 2월 즈음엔 한라봉을 먹을 수 있겠구나. 집으로 돌아가는데, 포대기로 아이를 업은 한 젊은 아낙을 보았다. 말라죽은 삼나무에 매달린 하늘타리가 음표처럼 보인다. 작업실을 리뉴얼했다. 밤 늦게까지 음악을 들었다. 곡을 쓸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