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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5/17

4/27

후박 나무 늘어선 중산간 어느 길가의 쇠파이프로 얼기설기 만든 울타리 안에서 검은 조랑말 한 마리가 혼자 살고 있었다. 풀도 별로 없는 흙밭에 우두커니 혼자 있는 모습이 쓸쓸해 보여서 나는 갓길에 차를 대고 조랑말에게 갔다. 너른 목장을 뛰노는 말들은 털에 윤기가 흐르고 다리가 죽죽 뻗은 좋은 혈통의 경주마일텐데 조랑말은 털이 뻣뻣하고 검고 다리가 땅딸합니다. 울타리 너머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먹을만한 풀을 우둑우둑 뽑아 입가에 대 주는 것 뿐이지만 조랑말은 이 낯선 사람이 주는 간식을 정말이지 열심히도 먹어주었습니다. 물통도 시원치 않아 제 얼굴을 비춰 보기도 힘들겠지만, 네 속눈썹은 정말 예쁘고 눈은 별처럼 맑구나 하고, 후박 나무 늘어선 이 아름다운 길가에 혼자 사는 이 예쁜 조랑말이 알아듣든 말든 나는 계속 얘기해주었고 조금은 멋대로이긴 하지만 이 쓸쓸해 보이는 조랑말에게 후박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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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을 위한 서울행. 잠시 다시 야행성 뮤지션 모드로. 

장자끄 상뻬와 마르크 르카르팡티에와의 대화록, 『상뻬의 어린 시절』 을 읽었다. 동심이란 참으로 알 듯 말 듯한 단어이긴 하지만, 맛으로 친다면 전혀 복잡하지 않은 - 어쩌면 포도당 맛 같은 건 지도 몰라. 

L: 선량함을 믿습니까?

S: 네. 네, 그래요.난 정말로 선량함을 믿어요.

L: 인간들이 선하다고 믿는단 말이죠?

S: 인간들이 선하지 않더라도 선량함은 분명 존재하며, 그걸 제대로 붙잡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4/29

아내를 처음 만난 날. 활주로에는 얼마나 안개가 자욱한지 비행기는 도무지 땅으로 내려올 기미가 없고 두 시간이 넘도록 그렇게 하늘을 맴도는 사이에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4/30

할머니

옆 집 할머니가 오셔서 노래 한 자락을 하시는데, 카메라를 들자 할머니는 무안해 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신명나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보현이와 함께 축구장 옆 잔디밭으로 밤 산책을 나갔다. 축구장에는 조기 축구회 사람들이 시합을 하고 있었다. 아빠들을 따라온 심심한 아이들이 어느새 하나둘 모여들더니, 다들 보현이와 함께 공 던지기를 하고 달리기를 하고 한참을 기분 좋게 놀다가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우리 둘은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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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리허설. 나는 비가 오면 어떻게 되는 건지, 계속 물어보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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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처럼 9시 즈음부터 비가 왔고 우리는 천막 아래에서 관객들은 우비를 입고 함꼐 공연을 했다. 비를 뚫고 소리는 더 부드러워졌지만, 빗방울이 거세지고, 흐르는 시간을 붙잡고도 싶고 놔버리고도 싶던 그 마음이란.

모두 고맙습니다. '이렇게 차가운 빗줄기 내리는 날에' 부른 '서울의 새'는, 정말 잊지 못할 거에요.

 

5/3

집으로. 주말 내내 보현이가 아프다. 밥을 거의 먹지 못하고 있다.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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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끝에 붙어 있는 돈나무 열매를 일일히 떼고 가지를 쳤다. 진딧물이 새 순에 꽉 찼는데, 날아드는 무당벌레를 보면 그렇게 마음이 든든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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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이를 병원에 다시 데리고 가 주사를 맞히고 약을 받아왔다. 잔디밭에 친환경 제초제를 뿌렸다. 

 

5/6

나무 병원에서 선생님들이 오셨다. 나무들을 하나하나 둘러보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과 함께 적당한 처방을 적어주고 가셨다. 재선충이 많이 번지는 터라 소나무가 걱정이었는데, 큰 이상이 없다는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놓인다. 보미씨가 보내준 시디가 도착했다.

정현종 시인을 인터뷰한 김여란 기자의 기사를 보았다. 조금 더 수줍게 말하고, 살고, 늙고 싶어졌다.

시인은 조심스럽냐, 그런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사람과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인간이 비이성적으로 변하는 순식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떤 생각이나 말을 자신만만하게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요. 예로 진실, 정의 같은 게 어떤 것인지 따져보려면 일생을 따져도 알기 힘들어요. 자기 이름에 대해서도 부끄럽고 수줍고, 그래서 나서기가 어렵고 그런 거지. (…) 침묵하고 저어하는 대신 시인은 세상의 작은 것들에서 생동하는 신비를 본다. “나이가 든다고 감동과 감수성은 무뎌지지 않아요. 사람이 갖고 태어난 , 그게 자연이지요. 저절로 그렇게 (시인이) 것이죠.” (…) 이런 것들에 감탄할 있는 여리고 애틋하고 선량한 마음을 세상에서 자주 만나기를 시인은 희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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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은 귤꽃 향으로 가득하다. 숲새였나 산솔새였나, 어미가 알을 품던 둥지가 텅 비었다. 유난히 휘파람새의 노래소리가 크다. 나뭇가지 사이 이리저리로 퍼덕이는 새들의 몸짓이 왠지 서투른가 싶다. 어쩌면 둥지에서 태어난 새끼들일지도 모른다. 날짜를 계산해보니, 처음 알을 품던 모습을 본 지 딱 이 주 째니, 아주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밭담 가에 내쳐진 나뭇가지들은 흙빛으로 변해간다. 노을 속 '코모레비(木漏れ日)'를 향해 셔터를 누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가에 잠시 멈춰섰다. 붉은 해넘이 앞으로 노랗고 파란 보리들이 넘실대고 있었다.

결국 보현이를 입원시켰다. 모든 이별이란, 마치 식탁 아래나, 베개 옆, 현관 뒤에 숨어있다 언제 어느 순간에 튀어나올 지 모를, 그런 건 아닐까.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만 살아있는 것이니까. 

 

5/8

보현이 무사히 퇴원. 돌아오는 길에 병원 근처 기계 상사에 가서 100 미터 짜리 약줄과 호스 등을 샀다. 동력 분무기용 그리스와 교반기는 들어오는대로 연락을 주시기로 했다. 육명심 선생의 컬럼, 「사진과 삶의 존재 방식 을 읽었다. 들판에 핀 노란 벌노랑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5/9

바닷가엔 유독 '갯' 자가 붙은 꽃들이 많이도 피어 난다. 연홍색 갯메꽃, 하얀 갯장대, 갯까치수염, 노란 갯씀바귀. 산책로를 따라 하얀 금은화가 피어났다. 엉겅퀴가 쭈뼛쭈뼛 자라고, 모래밭에 핀 하얀 모래지치가 향긋하다.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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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숲길에는 연분홍 줄딸기 꽃이 많이도 피었다. 검고 푹신한 흙길가에는 하얀 콩제비꽃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손을 채 펴지 않은 고사리 순도 아직은, 있다.

동네 바닷가에서 노란 날개빛의 방울새들을 보았다. '방울새처럼 명랑하다 (gai comme un pinson)'더니, 날아가는 방울새들을 잠깐 잠깐 보기만해도 그저 즐거운 건 그래서인가.

 

5/11

비가 몹시 오고 바람이 부는 날. 동진이 놀러왔다. 처음으로 꽃 선물을 받았다. 성하 군의 시디가 도착했다. 

 

5/12

농협에서 동력분무기를 찾아왔다. 60%가 읍 지원으로 산 셈이라 기계 하나를 찾는 일도 간단치가 않다. 일단 인수했다는 증거 사진 한 장을 찍고, 농협에서 건네준 서류를 들고 주유소로 가서 면세유 신청을 하고, 면세유 신청을 하기 위해 품질 관리원에 전화를 해서 농업경영체 서류를 받고, 리사무소로 가서 이장님 도장을 받아서 다시 주유소로 갔다가, 읍 사무소로 가서 서류를 내고 이름표 하나 걸고 또 사진을 찍고. 아무튼 고맙습니다. 잘 쓰겠습니다.

분무기를 싣고 선생님을 만나러 EM 센터로 향했다. 사무실에 안 계시길래 다른 분과 얘기를 나누다가 약제를 가지러 창고로 갔더니 마침 그곳에 계셨다. 선생님. 저 몇 달 전에 교육 받았던 교육생입니다. 몇 기인데?? ... 글세요, 기억이 잘... 몇 달 전인데? ... 글세요... 그게 기억이 잘... 암튼 완도에서 전복 하시는 분들이랑 같이 받았었는데요... 아 그래? 선생님 시키신대로 발효액 관주를 해야하는데 평 당 몇 말을 뿌려야할 지 모르겠어서... 교육 받아놓고 그것도 몰라?? 아...네...

"근데, 꽃은 왔어?"

꽃이 왔느냐. 그러니까, 귤꽃이 피었냐,는 뜻이다. 꽃은 왔느냐... 선생님의 그 말씀에 감탄을 한 건지, 나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네, 피었습니다... 만개했어? ...아직... 이 시점에서 나는 망게이라를 떠올리고 말았으니... 죄송합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피었을 때, 그걸 만개라고 하는 거야. 알았어? ... 아... 네...  꽃이 만개하면, 이렇게 뿌려, 라며 레시피를 알려주신다. 트렁크 가득 말통들을 싣고 집으로 돌아 오는데, "5월 말 보르도액 뿌리고 또 와서 물어보고 가" 하시던 선생님의 그 쌀쌀맞은 목소리마저 어찌나 든든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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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유령 크니기의 최종 교정을 보았다. 

 

5/13

연노란 보리수 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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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다를 보았다.

 

5/14

면세유 카드를 만들었다. 분무기 전용이니 얼마 되지 않을 양이겠지만,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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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상사에 가서 그리스와 엔진 오일, 수도관 니플을 사왔다. 삼나무 이끼처럼 푸른 동박새 한 마리를 보았다. 선희씨가 보내준 코코넛 오일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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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까지 비가 안 올거라는 예보를 믿고, 아침 일찍 밭으로 향했다. 주유소에 들러 면세유를 받아 들고 다시 농협으로 가서 25 미리 수도꼭지에 연결할 니플을 사고, 수도관을 연결해서 물통에 600 리터 물을 받고, 호스를 연결하고, 분무기에 엔진오일과 연료를 넣고, 시동. 50 배 희석한 EM 발효액을 나무 밑에 관주하는 일인데, 주 당 4 리터 정도를 줘야하지만 양을 가늠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니 잔량을 체크하면서 감을 잡아 나가는 수 밖에 없다. 넉넉하고 골고루 관주를 했다. 노린재 같은 벌레들이 슬금슬금 보이기 시작한다. 같은 밭이라도 부분부분마다 땅이 다 다르고, 따라서 흙의 상태도 자라는 지피식물도 모두 다르다. 그나저나 이 밭도 결국 팔렸다고 하니, 내년에는 또 다른 밭을 어떻게 알아봐야 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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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길에 별 하나를 보았다. 별무리는 아릿한데 별빛은 오히려 더 밝았다. 며칠 전 주문한 한철 형, 박윤우 트리오, 조응민 트리오, 제주 사운드 스케이프 시디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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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보고, 과수원 한 군데를 보고, 후박이를 만나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