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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5/3

4/22

나는 과수원을 학교라 부른다. 오늘 나는 오후반 수업을 갔다. 선생님은 없는, 학교다.

덩치 큰 나무 한 그루, 잎 속 그늘진 곳에 깍지 벌레들이 많다. 크게 자란만큼 잎은 무성하고 짙푸르다. 벌레는 연약한 나무 못지 않게 덩치만 크게 웃자란 나무도 좋아한다. 사람과 똑같다.

우리는 나무의 주지를 함부러 자르지 않으려 한다. 될 수만 있다면 강전정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일 년 동안 자란 순만 부지런히 자르고 잘 자란 순은 지켜주며 수형을 유지하겠다는 마음이다.

100 명의 농부가 있다면, 100 가지 방식으로 전정을 할 것이다.

일본에서 테잎 레코더가 왔다.

제비들이 마을로 몰려든다. 구름이 아름다운 날. 보현과 걷고 또 걸었다.

4/23

방제 #2-1:  1000 L 보르도칼 두 봉지 + 기계유 유제 5 L.

벚나무 길목을 돌아 과수원으로 들어서는데, 문득 어쩌면 이 일이 나의 천직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7년 만의 일이다.

보현이 첫 저작권료를 받은 날, 첫 수확한 표고 버섯으로 함께 축하를 했다.

레코더의 트랙 하나가 고장인 것을 알았다. 생각난 김에 황 사장님께 전화를 했는데, 릴데크 수리는 아직 멀었단다. 오래된 장비는 늘 골치다.

4/24

잘 자란 담팔수 한 그루를 보았다. 상처가 없어 아름답게 큰 나무를 보면, 깊은 어딘가가 아프다.

무슨 사연인지 깨진 꿩알이 산책길에 많이 보인다.

올해를 넘길 수 있을까 싶은 나무가 과수원에 몇 그루 있다. 그런 나무를 위해 액비를 관주해주었다. 650 L 정도의 물에 작년에 만든 액비 한 말과 아미노 액비 5 L를 넣어 동력 분무기로 뿌렸다.

수 백 그루의 나무 중에는, 무척 약하고 여린 나무도 있고 하늘 높은 줄 모르게 가지를 뻗는, 수세가 강한 나무도 있다. 연약한 나무는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죽지만, 강한 나무는 일 년만 지나도 엄청나게 순이 자라서, 한 시간이 넘게 가지를 쳐내야 한다.

6 년 동안 대략 세 그루의 나무가 죽었고, 올 봄 한 그루가 더 죽었다. 나는 나무를 살린 적도 있지만 살리지 못한 경우도 많다. 나무도 삶의 열쇠는 스스로에게 있다.

4/25

약하디 약한 나무의 꽃눈을 따주었다. 따도 따도 꽃눈이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한 그루의 나무가 삶을 마감할 때, 유난히 많은 꽃을 틔우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어제만해도 나는, 이 나무가 곧 죽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바싹 마른 가지에 두 손을 갖다 대었는데 손끝이 따뜻했다. 그건 아마도 빌레 위로 내리쬔 햇살 때문이었겠지만. 그 순간, 어쩌면 너를 살릴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나무는 햇살을 가려주고, 나는 나무를 죄는 덩굴을 끊어준다. 각자의 힘으로 서로를 돌보는 것.

내일 방제를 할 때 약해를 입지 않게 표고목에 천막을 씌워주웠다.

담벼락 위로 짝을 찾은 제비들이 정신없이 활공을 한다.

4/26

영락없는 봄 날. 제비가 집 현관 앞에 입주를 했다. 아침부터 재잘대며 소리를 지른다. 반갑게 돌아온 4월의 소리다.

제비들은 곧바로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했다. 진흙을 물어와 둥지의 담을 더 높게 쌓고, 그 안에 뭔가를 열심히 깔아두는 듯 싶다. 5 마리 새끼를 키우기엔 이 둥지는 작은 편이라, 재작년 여름엔 날개가 약한 새끼 한 마리가 마당으로 떨어진 적도 있었다. 어, 그런데 암제비의 날개 한 쪽이 이상하다. 검은 깃 사이로 언뜻언뜻 유난히 흰 잔털이 많다. 혹시 그 아이가 돌아온 건가.

보르도액/기계유유제 방제 #2-2: recipe는 #2-1과 동일.

나무 한 그루는 개별자가 아닌, 하나의 사회 같다.

4/27

Peak + BSP: 만든 패치로 라이브 연습을 하다.

삼각지의 나무들을 전정했다. 아무리 덩치가 산만해도, 차근차근 다듬다보면 거짓말처럼 작년 이 맘때 모습이 된다.

밭담 너머에서 남자 아이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공놀이를 하다가 공이 넘어갔어요. 응, 그래? 삼촌이 꺼내줄까? 앞니가 빠진 여자 아이가 오더니, 무서운 아저씨 같았는데, 하더니 사라진다. 남자 아이는, 어딘가로 갔다가 쪼로로 와서는, 이게 귤밭이에요? 응, 귵밭이지. 다시 멀리 사라진다.

느즈막이 목욕을 하고 돌아오는 길, 눈부시게 아름다운 노을을 보았다.

4/28

나는 마당일을 하고, 제비 부부는 열심히 둥지 보수를 한다.

당연해 보이는 것도, 실은 모두 경이롭다.

토양 검정 결과를 받았다. pH가 높아져 거의 중성에 가까워졌고, 유효 인산과 칼륨 이온이 많아졌다. 작년 감귤이 유난히 맛있었던 이유가 있구나. 올해엔 패화석을 뿌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감귤 나무는 긴 시간에 걸쳐 결국 사람의 반려 식물이 된 게 아닐까 싶다. 반려견이 야생에서 모두 살 수 없고 인간이 야생에서 살아 남기 어렵게 되었듯, 내버려 두면 어쩔 수 없이 위험해진다.

'땅을 만든다'는 건, 순환이 시작될 때까지 버틸 수 있도록 저금을 하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보리밭이 아름다워 차를 세웠다.

4/29

보현과 아내와 내가 처음 만난 날.

제비가 알을 품었다.

보호소에 가서 먹을 것을 전해주고 아이들과 실컷 놀았다. 나는 강아지들과 하루 종일도 놀 수 있다.

소나무 둥치에 뭔가 반짝, 하는 것이 있어 가보니, 눈물 같은 송진 방울이 달빛에 빛나고 있었다.

4/30

돈나무의 꽃을 따주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오랜만에 찾은 오름길을 오래오래 보현과 걸었다.

5/1

어김 없이 오월의 첫 날, 레몬꽃이 왔다.

브라이언 이노는, 공감 능력(empathy)이란 능동적 상상력 (active imagination)으로 스스로를 훈련해야 하는 일인데, 그것이 곧 우리가 예술을 필요로 하는 이유라고 했다.

정진씨와 친구들이 밭에 와서 놀다 갔다. 함께 온 친구는, 지금은 타운하우스가 들어 선 근처 마을은 원래 거대한 곶자왈이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지금 이 과수원을 둘러싼 타운하우스들도 수 천 그루의 나무가 베어지고 태워진 땅 위에 지어진 것이다. 지난 설날, 옆 집 형님은 우리집이 있는 이 동네가 원래 바다였다고 말해 주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집도 언젠가는 바다직박구리나 숭어 혹은 게나 갯강구의 집이었을 것이다.

Federico Durand의 새 앨범을 너무나 기다렸다.

5/2

음반은 뮤지션의 맥박인가.

5/3

한 때는 매일 걷던 길을 몇 년 만에 보현과 함께 걸었다. 이 시골길에도 커피숍이 생기고 게스트하우스도 생기고, 고깃집도 생겼다. 절간 대문은 낯설게 바뀌었다. 그 앞으로 또 무엇이 들어설까 싶은 거대한 건물이 올라가고 있다. 그늘진 바닷가에는 사람들이 돌을 쌓아 올려 작은 탑을 만들어 두었다. 하나같이 무너질 듯 보여도, 어느 하나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도 같다. 하늘거리던 억새가 있던 자리엔 갯무의 떡잎이 듬성듬성 돋아나있다. 도요새와 제비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양어장 근처에 새로 지은 집은 벌써 부식되어가고, 집집마다 차는 있지만 아무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 옆으로 멋지게 심은 나무는 가엾게 말라가고 있었다. 물떼새가 보인다. 구름 다리가 생겼고, 일 분만에 옆 동네로 갈 수가 있게 되었다. 이 많은 것들이 생기고 바뀌는 동안, 우리는 한 번도 이 길을 걷지 않았다.